서경희
/함북 경성 출생. 99년 탈북.

북한에는 마을이든 학교든 빠짐없이 김일성 혁명역사연구실이라는 곳이 있다. 흰 양말을 신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들어가서 경건하게 학습을 받는 「의식」(儀式) 장소다. 이곳만은 윤이 나도록 깔끔하게 청소하고, 고급스럽게 단장해야 한다.

내가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96년 김일성 연구실외에 김정일 연구실을 하나 더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탁아소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모든 사회단체들이 이 사업을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평가하는 일로 삼고 있어 전투를 방불케 했다.

연구실을 만들려면 방을 한 칸 더 마련해 필요한 자재를 들여놓아야 하므로 돈이 엄청나게 들었다. 총 11명의 우리 유치원 직원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토의를 한 결과 선생들이 직접 장사를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을 합동수업시키기로 하고 몇 명의 선생들만 남겨놓고 나머지 선생들은 장사를 다녔다.

분필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들이 장사를 하다 보니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잘 되지 않았고 필요한 비용의 전액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원아들에게 일인당 북한돈 30원씩을 부담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유치원에 결석하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가정에 30원은 큰 돈이어서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이 과업을 수행하지 않으면 원장을 비롯한 선생들의 정치적인 불성실로 인정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겨우 자금을 마련하고 보니 김정일 어린시절 사진들을 도록(圖錄)으로 만들어 액자에 넣기 위한 유리를 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유일하게 큰 유리공장이 있는 남포(지금은 없어졌다)에 가서 구입하기로 결론이 났다. 나도 동참하게 되었다.

함경북도에서 평안남도를 거쳐 남포까지 가는 길에 처음으로 말로만 들었던 비참한 생활상을 실제로 목격할 수 있었다. 여자들만 갈 수는 없다고 하길래 남자 학부형 셋과 함께 떠났는데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불과 몇 시간 후에 알 수 있었다. 열차를 타려고 홈에 나갔더니 산더미처럼 쌓인 짐과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로 열차에 오르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사람들이 붐비는 출입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기에 할 수없이 학부형들의 도움으로 창문으로 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차에 타고 가는 이틀 동안 꼬박 서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니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언제 체면을 운운했던가 싶게 열차 바닥에 앉아서 옆 사람에게 기대 잠을 자기 시작했다. 열차안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다. 열차안이 사람들로 가득 차다보니 남자들은 열차 지붕위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고압전기에 감전돼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간난신고 끝에 남포에 도착해서 유리를 구입했고, 돌아오는 길 역시 연착되는 열차를 3일이나 대기실에서 기다려 그 "위대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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