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침 1보 방송한 위진록 前 아나운서 訪韓]

北이 방송국 차지, 3개월간 도피… 임시 스튜디오서 서울 수복 방송도
주일미군 아나운서 근무 후 渡美 "전쟁이 내 인생 송두리째 바꿔놔"
 

1950년 6월 25일 새벽, KBS의 3년 차 아나운서였던 스물두 살 위진록씨는 당시 서울 덕수궁 뒷편에 있던 서울중앙방송국 숙직실에서 당직 근무 중이었다. 오전 5시 10분쯤 문을 두드리며 다급해 외치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국방부에서 왔다는 한 대위가 소리쳤다. "지금 북한군이 내려오고 있으니 당장 긴급 방송을 하시오!" 위씨는 급하게 원고를 작성해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6·25전쟁 발발을 알리는 1보(報)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위진록(89)씨는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다른 참전 용사들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본지 6월21일자 A27면〉. 22일 만난 그는 아나운서 출신 특유의 낭랑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그날의 기억을 전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전쟁의 참상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했다.
 
6·25전쟁 당시 남침 1보를 방송했던 위진록 전 KBS 아나운서가 22일 본지와 만나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남침 1보를 방송했던 위진록 전 KBS 아나운서가 22일 본지와 만나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위씨는“전쟁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고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6·25전쟁 직전엔 38선을 두고 남북 간 소규모 전투가 잦았다. 위씨는 "방송을 할 때만 해도 전면전이 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정작 '남침 1보'를 전한 그는 서울운동장에 축구 경기를 관람하러 갔다고 했다. 그는 "장내 아나운서의 '경기 중단 선언'과 함께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砲聲)에 비로소 전쟁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며칠 후 찾은 방송국은 인민군 차지가 돼버렸다. 평양에서 온 북한 방송국 직원들은 위씨에게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당시 KBS 아나운서 중 일부는 '이승만 정부에 부역했다' 등 이유로 인민재판을 받거나 행방불명됐다. 위씨는 '가난한 무산계급이므로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의 자백서를 작성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위씨는 방송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북한 휘하의 방송국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자유의 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게 두려웠습니다."

위씨는 그 이후 약 3개월 동안 파주 문산 친구집과 서울 안암동 친척집 등을 오가며 숨어 지냈다. 인민군의 눈에 띌까 두려워 대청마루 밑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해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고 28일 서울을 탈환했다. 서울 탈환 소식을 들은 위씨는 숨어있던 안암동 친척집을 나와 연희송신소(당시 고양군 연희면)까지 뛰어갔다. 열댓 명의 기술자들이 폐허 속에서 어렵게 세워 올린 '임시 스튜디오'에서 위씨는'서울 수복 제1보 방송'을 전했다.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서울시민 여러분, 오늘 새벽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을 추격하며 북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위씨는 이후 도쿄에 있는 유엔군총사령부(VUNC)로 건너가 아나운서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맥아더 장군 휘하에 있던 심리작전장교가 "위씨의 목소리가 CBS 방송의 2차 대전 종군 아나운서 월터 크롱카이트와 닮았다"며 스카우트했다. 한 달 뒤에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내일 점심은 평양에서 먹는다'던 전쟁은 그 뒤로도 3년이나 계속됐다. 위씨는 도쿄·오키나와 미군 사령부에서 22년을 아나운서로 일했고, 1972년 도미(渡美)했다. 현재는 로스앤젤레스(LA) 근교에 거주하며 가끔 한국에 들른다. 위씨는 "전쟁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며 "절박한 자세로 이 땅의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2/20170622035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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