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현장에 기술·사상 점검 목적 청년층 파견
실무경험 없고 분란 일으켜 '원성의 대상'전락


북한 「사회주의건설의 총노선」으로 규정된 3대혁명(사상·기술·문화) 수행의 전위대·선봉대로서 3대혁명소조가 정식 출범한 것은 1973년 2월이다. 1973년 2월 1일 열린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결정에 따라 2월 중순 3대혁명소조가 공장·기업소 등 공업부문에 나갔고, 2월 하순에는 협동농장과 국영 농목장(農牧場)에도 파견됐다.

북한은 이에 앞서 72년 가을 「기술적 방조」(기술지원)를 명분으로 일단의 지도소조를 경공업공장에 파견해 사전 탐색작업을 벌였다. 이들이 현지에서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파악해 정리한 결과는 일선 생산현장의 무사안일과 보수주의·관료주의가 생각이상으로 견고하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으로 3대혁명소조의 필요성은 충분히 검증된 셈이었다.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결정은 이런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최종 결론이었다.

소조는 사상, 기술, 문화의 3개 분야로 나뉘어 파견됐고, 단위 소조는 지도대상에 따라 20∼50명으로 구성됐다. 소조원은 당초 당 초급간부와 대학생으로 조직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행정·경제기관 간부와 공장·기업소 기술자, 대학교원, 학자·연구원 등 청년지식층으로 범위가 확대됐다. 지도대상도 공업과 농업 등 주요 부문에서 점차 건설, 운수 등 인민경제 각 분야로 확산됐다.

74년 2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후 그가 3대혁명소조운동을 장악하면서 한층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3월부터 중앙과 지방에 있던 3대혁명소조 종합실을 3대혁명소조 지휘부로 개편하고 5월에는 이를 당에서 직접 지도, 통제하도록 했다. 소조원들의 자질향상을 위해 강습과 모범단위 견학, 방식상학(시범학습)도 수시로 마련했다.

3대혁명소조는 3대혁명에 대한 당적 지도, 즉 생산현장의 기술지원과 사상점검, 건전한 생산문화·생활문화 창달을 표방하며 출범했다. 일선 간부들과 근로자들의 소극성, 보수주의, 관료주의, 요령주의, 형식주의 등 온갖 「낡은 사상잔재」를 타파하는 것이 1차적 과제였으며, 새로운 사회주의 사상과 기술로 무장시켜 업무효율과 생산능률을 향상시키는 궁극적 목표였다.

그러나 실제 생산현장에서 나타난 결과는 당초의 취지와 정확히 맞물리지 않았다. 김일성이 이들을 내보내면서 『까다롭게 놀지 말며 늘 겸손해야 한다』든가, 『까박을 붙이거나(트집을 잡거나) 욕설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지만 우려가 현실화한 것이다.

지식은 갖췄지만 실무경험이 없거나 부족한 이들이 공장·기업소의 오랜 간부들을 드러내놓고 무시하고, 생활총화 때 부모뻘의 노동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망신을 주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공장·기업소 간부와 종업원들의 업무태도와 일상사를 감시해 보고하는가 하면 심지어 간부들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기도 했다.

기술방조와 사상점검이라는 사명을 무색케 하는 소조의 전횡에 생산현장의 분위기는 극도로 위축됐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대혁명소조는 공식 발표 없이 20여 년이 지난후 조용히 사라졌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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