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 한문교실 여는 김중양 이북5도청 평안남도 도지사]

평안남도서 태어나 6세 때 월남… 집집마다 내려온 자료 해석 도와
사료 보존 위해 향토지 발간 앞장 "한자 알아야 역사 이어갈 수 있어"
 

한 장수가 청기 홍기 세워놓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는 홍기에 가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청기에 가라." 딱 한 부하만 청기 앞에 섰다. 장군이 놀라 물었다. "너는 어떤 수양을 쌓았길래 이러한가. 그대야말로 사내대장부로다." 부하가 답했다. "아내가 '남자 셋이 모이면 반드시 색(色)을 말하니, 셋 이상 모인 곳엔 가지 말라' 했습니다."

조선 학자 서거정(1420~1488)이 쓴 '태령한화골계전'의 한 대목 '여신물왕(汝愼勿往·너는 가지 말아라)' 이야기를 소개하자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 소강당이 왁자지껄해졌다. 김중양(72) 평안남도 도지사가 이북 도민들에게 여는 무료 한문 교실이다. 강의 이름은 '웃으면서 익히는 한문 교실.' 교재도 그가 직접 썼다. 사서삼경과 한시, 옛 문헌 등에서 발췌한 문구로 구성했다. "한자는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잖아요. 재미가 있으려면 웃음이 나와야죠."
 
김중양 이북5도청 평안남도 도지사는 좌우명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를 칠판에 썼다. ‘한번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백번 참을 줄 아는 가정에는 큰 평화가 있다’란 뜻이다.
김중양 이북5도청 평안남도 도지사는 좌우명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를 칠판에 썼다. ‘한번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백번 참을 줄 아는 가정에는 큰 평화가 있다’란 뜻이다. /박상훈 기자

작년 9월 도지사에 임명된 그는 올해 1월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 2시간씩 한문을 가르친다. "매번 수강생 60~70명이 강의실을 꽉 메울 정도로 호응이 좋아요. 30대부터 90대까지 다양합니다." 실향민이 북에서 가져온 자료 대부분이 한자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주민들이 향토지를 발간하고 싶어도 해독을 못 해요. 독재가 3대 세습되는 동안 북한 문화가 말살됐습니다. 평양 검무나 황해도 봉산탈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북 문화도 희미해졌어요. 향토지를 발간해 잊혀가는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이달 평안남도 진남포시를 다룬 향토지가 26년 만에 출간됐다. "일제강점기 시가지를 비롯해 희귀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어요. 통일 후 귀중한 역사 자료로 활용될 겁니다."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인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원군이다. 여섯 살 때 6·25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대동강 다리를 건너 충남 예산에 정착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활동하신 곳이라 서당이 많았어요. 학교 갔다오면 서당에서 천자문과 소학을 자연스레 배웠습니다." 1972년 총무처 사무관으로 입문해 30년간 공직에 몸담으며 대구 지하철 참사 수습본부장, 소청심사위원장 등을 지냈다. 행정학계 스테디셀러인 '한국인사행정론' 등 인사 관련 저서 5권을 내기도 한 그는 퇴직 후 영산대 행정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도서관 문화교실에서 3년간 한문을 가르치는 재능 기부를 했고, 2009년부터는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 블로그 '삼덕산방'을 열고 한문 강좌를 올렸다. 누구나 강의 자료를 가져갈 수 있게 해놓았더니 매일 100~200여 명이 방문하는 공간이 됐다. 지금껏 총 35만명이 다녀갔다.

피란 올 때 가져온 족보책, 제적 등본, 한문 적힌 선친의 유품을 가져오는 수강생이 많다고 한다. 그는 "한 자를 몰라 답답해하는 이북도민들 궁금증을 풀어주는 일이 강의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했다. 3개월 과정이 끝나면 수강생 하나하나 호(號)를 지어준다. 최고령 수강생은 황해도 출신 94세 할머니다. 호는 '학송(鶴松)'을 지어드렸다고 한다. "학이 푸른 소나무에 앉아 유유히 세월을 즐기는 것처럼 사셨으면 해서요." 김 지사는 98세 노모를 모시며 살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2/20170622001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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