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민족화해委 성명에서 "보수패당 심판" 주장해
반인륜 범죄의 수용소는 휴전선 이북에 있는데
분노도 관심도 없는 게 우리 젊은이들의 표상인가
 

류근일 언론인
류근일 언론인
'역사 다시 쓰기' '구시대 척결' '지난 시대 세탁'이란 말들이 나돌 무렵 나온 책 한 권이 있다. 2001년에 프랑스 출판계를 뒤흔들었다는 '처절한 정원(미셸 캥 지음, 이인숙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이었다. 나치에 부역한 프랑스 비시 정권의 과거사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 아버지는 교사이면서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이곳저곳에 위문 공연하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싫었다. 그러나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주인공 아버지는 20대 때 그의 사촌과 함께 '마치 무도회에 춤추러 가는 심정'으로 비시 정권하에서 반(反)나치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그는 자기 마을의 변압기를 폭파하고 그 자리를 떴다. 그러곤 곧 붙잡혔다. 한 짓이 들통나서가 아니었다. 다른 레지스탕스 대원 하나가 자수할 때까지 프랑스인 인질들을 하나하나 총살하겠다는 독일군의 꼼수에 걸려든 것이었다. 마을의 프랑스인 헌병이 인질용 체포자 명단에 애꿎은 그의 이름을 끼워 넣었던 것이다. 그는 그러나 죽을 고생을 한 끝에 풀려났다. 변압기 폭파의 진범이 붙잡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한 여인이 다 죽게 된 남편에게 이왕 죽을 바에야 남에게 좋은 일(인질 석방) 하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남편도 눈빛으로 동의했다. 그 남자는 주인공 아버지의 변압기 폭파 현장에 있다가 치명상을 입었던 것이다. 모든 걸 알게 된 아버지는 그 후 부채 의식에서 평생을 낮은 자세로 살기 위해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봉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미셸 캥의 '처절한 정원' 원서.
무대를 1990년대로 옮긴 주인공은 아버지를 추모해 어릿광대 차림을 하고 한 법정에 들어가려다 제지당한다. 비시 정권의 경찰 간부로 있으면서 유대인 1590명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낸 모리스 파퐁에 대한 뒤늦은 전범 재판이 열리고 있던 때였다. "아버지, 파퐁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법정이 반(反)인륜 범죄자, 살인자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 지켜보렵니다."

우리 경우도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해 지속적인 논란이 있어 왔다. 구시대의 때를 씻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다만 때의 범위를 어느 만큼 잡느냐의 논의는 있을 수 있다.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잡을 경우 우리 사회의 반은 숙청돼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민족화해위원회'란 단체 대변인의 성명 같은 게 바로 그러했다. 그는 말했다. "이번 남조선 선거는 지난 10년 동안 북남 관계를 최악의 파국으로 몰아넣은 남조선 보수패당에 대한 촛불 민심의 준엄한 심판…보수패당은 숨 쉴 자격조차 없어…역사의 반동들을 모조리 매장시켜야…" 국정 농단으로 기소된 당사자들뿐 아니라 '무릇 보수'는 통째 말살, 제거, 절멸해야 한다는 소리다. 한반도를 특정 이념 일색으로, 역사의 반동으로 낙인 찍힌 자들의 처절한 전체주의 정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모리스 파퐁의 반인륜 범죄와 아우슈비츠 체제는 그러나 오늘의 한반도에선 휴전선 이남이 아닌 이북에 있다. 휴전선 이남에도 정신적인 '처절한 정원'은 없지 않다. 휴전선 이북의 '처절한 정원'에 분노하고 개탄하는 것은 '안보 보수주의'라 해서 요즘 젊은이들은 그따위(?) 것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며칠 전 20·30대에게서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다. 보수 세대가 아무리 싫어도 그들이 말해주는 북의 수용소 군도(群島) 이야기는 싫어할 이유가 없을 터인데 왜 그러나? 아프리카 르완다의 과거사도 아니고 같은 땅 코앞에 현존하는 홀로코스트(학살)에 무덤덤한 게 미래 한국인의 표상이어야 할까? 현실에 대한 불만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냉담이야말로 북한 주민들에겐 또 하나의 '처절한 정원'으로 다가갈 것이다. '처절한 정원'의 공동 주인공인 자유지성은 그래서 고백해야 한다. "인류 양심의 법정이 평양 집단의 반인륜 범죄에 대해, 그리고 그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부도덕에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 지켜보려 한다"고.

기성 보수가 잘못했으면 잘못한 만큼 맞아야 한다. 그러나 특정 보수 권력파의 특정 흠결을 '보수 종(種)' 자체, '보수 시대 한국' 자체를 마치 소멸시켜야 할 '처절한 정원'인 양 확대 해석하는 것은 적실(適實)하지 않다. 촛불 초심을 그렇게 끌어가선 안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2/20170612027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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