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학 대한해협해전 전승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최경학 대한해협해전 전승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지난 4월 20일부터 사흘간 미국 버지니아주 힐튼호텔에서 미국 참전 용사들이 주축이 되어 6·25전쟁을 주제로 한 미국 최초의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필자는 전쟁 당시 한국 해군이 첫 해전인 대한해협해전에서 승리한 내용을 발표하기 위해 참석했다.

미국은 6·25전쟁으로 우리만큼 엄청난 아픔을 겪었다. 전상자가 총 13만259명에 달하는데, 전사자 3만3686명, 부상자 9만2134명, 포로가 4439명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이런 희생에도 아직도 '휴전' 상태여서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참전 용사 중에는 아이젠하워, 벤프리트, 워커 장군의 아들 등 유명 인사의 자식도 142명 참전해 35명이 전사했다. 한마디로 6·25전쟁은 우리뿐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기도 했다.

참전 미 육군 제3사단 전우회 국제지회가 주관한 세미나에서는 6·25전쟁이 남긴 영욕의 자취를 23개 사례 발표를 통해 되짚어 보았다. 나는 세미나 준비차 미국 측 관련자들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미국의 참전 용사 2세대도 한국전쟁에 관해 후대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특히 미 육군 제3사단 전우회 국제지회의 팀 스토이와 모니카 스토이 회장 부부는 한국 외에도 베트남과 아프카니스탄 등을 다니며 참전의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을 해왔다.

부부는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첫 승리가 6·25전쟁 향방의 중대 전환점이 됐다는 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에 해군이 나라를 위해 전투함을 구입하려고 전 장병이 봉급을 갹출하고, 장교 부인들은 바느질에 나서는 등 1만5000 달러를 모금해 한국 해군 첫 전투함을 마련했다는 점, 이 전투함이 1950년 6월 25일 밤에 부산으로 침투하려던 무장 세력을 막아냈다는 점, 그래서 부산이 미군 등 유엔군 참전의 교두보가 되어 한반도 공산화 저지에 기여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세미나에서 이를 한국 해군이 직접 발표해달라고 요청해온 것이다.

1950년 6월25일 병력 600여명과 탄약, 식량 등을 가득 실은 북한군 무장수송선을 4시간여에 걸친 추적전 끝에 격침시킨 해군 백두산함. /조선일보 DB
필자의 발표를 들은 참전 용사들은 이런 사실은 처음 알았다면서 한국 해군에 경의를 표했다. 세미나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부관 출신으로 현재 100세인 에드워드 로우니 예비역 중장이 1시간 넘게 전쟁에 대해 증언했다. 이 노장군은 한국전쟁과 미군 이야기를 책으로도 발간해 알리고 있다. 존 잭슨씨는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귀국한 경험을 얘기했다. 그의 형과 동생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다리와 몸통에 총상을 입은 론 러셀씨는 휠체어를 탄 채 중공군과의 치열했던 전투에 대해 증언했다. 총탄에 왼쪽 귀를 잃은 파커 톰슨씨는 안경 한쪽에 고무줄을 걸어 쓰고 강단에 서기도 했다.

온몸에 상흔 가득한 이들이 참전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이다. 6·25전쟁에서 우리 군인, 미군, 유엔군, 학도병,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특수부대원 등 모두가 자유 수호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 이 모두에게 감사하고, 자유는 희생 없이 지킬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외침에 시달 렸지만 동족상잔은 6·25전쟁이 처음이다. 1953년 휴전 이후 64년이 지났고, 이제 세계에서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하나 남았다. 참전했던 미국의 노병들은 한결같이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고 있었다. 북한의 이산가족들도 자유 통일을 염원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 지금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할 것인지 다시 깊이 생각하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8/2017060803012.html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