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말없이 계속 듣고만 있었다
반 전 총장의 기대처럼 '진지한' 경청일 수 있지만
굳이 말을 섞을 필요를 못 느꼈을 수 있다"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청와대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초청한 것은 보기 좋았다. "사드 보고 누락에 매우 충격적"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반응이 톱뉴스를 장식하고 사흘 뒤였다.

청와대 측은 "당초 예정 시간(70분)을 훨씬 넘겨 1시간 50분 동안 진행됐다"며 대통령의 소통(疏通)을 부각시켰다. 대화 내용도 브리핑했다. 하지만 핵심 부분이 빠졌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 어떤 대화가 오갔느냐"라는 출입기자들 질문에, "그건 외교 전략과 관련된 문제"라며 함구했다.

우연히 나는 미공개된 부분을 듣게 됐다. '외교 전략'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정보나 기밀이 포함된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 수준의 내용이었다. 단지 현 정부의 입장에서 좀 불편한 발언을 반 전 총장이 했다는 것뿐이었다.

"저는 오바마 정부 사람을 많이 압니다. 이들은 한국의 사드 논란에 대해 크게 우려합니다. 미국에서는 안보에 여야가 없어 트럼프 정부 사람들도 아마 똑같을 겁니다. 중국과의 관계는 경제 문제이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만, 미국과의 관계는 안보 문제이고 우리 생존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 외교는 한·미 동맹을 근간으로 하고, 그걸 벗어나면 위험합니다. 미국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지 않고 계속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반 전 총장의 기대처럼 '진지하게' 경청한 것일 수 있지만,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당초 '정치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대통령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 있지만 굳이 말을 섞을 필요를 못 느꼈을 수 있다. 본인의 마음은 벌써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 뒤 사드 문제가 굴러가는 걸 보면 확실히 후자 쪽이다.

문 대통령의 탈권위적 스타일과 감성 정치에 홀리면 내용과 본질을 놓치게 된다. 그가 부드럽게 보인다고 해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잘 수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의견들 앞에서 그는 자기 생각을 더 굳히는 고집이 있는 것 같다. 그는 대학 시절 운동권으로 체계적인 단련 과정을 거쳤다. '반미(反美)면 어떠냐' '아시아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다'라고 했던 노무현의 비서실장으로 지냈다. 함께 공유하고 체득한 경험이 남아있을 거다. 어쩌면 노무현보다 더 일관된 '마이웨이'를 할지도 모른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문 대통령을 도와온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오후 청와대 본관 백악실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오찬회동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사드 논란의 재점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문 대통령은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따라가지 않고 자주적으로 하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참모들은 이런 문 대통령의 뜻을 헤아려 '사드 보고 누락' 소동을 일으켜 원점으로 되돌리려고 한 것이다. 일종의 정치적 꼼수를 썼다. 국방부가 어떻게 대통령께 은폐할 수 있겠나. 정의용 안보실장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한민구 국방장관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고 대통령께 과장 보고를 했다고 본다. 대통령이 '매우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청와대의 뜻대로 연내 사드 배치 완료에 제동이 걸렸다. 감사원의 대대적인 감사가 벌어질 판이다. 우리 국민의 입장에서 '절차적 투명성'이 확보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드 문제는 우리만이 아닌 미국의 입장에서도 봐야 한다는 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드 장비가 오산 공군기지로 처음 반입된 날짜는 3월 6일 밤이었다. 바로 그날 북한은 동해 상으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4발을 동시에 발사했다. 이 중 한 발은 일본 영해에 떨어졌다. 미국이 북 미사일 공격 위협을 피부로 느낀 순간이었다. 그날 소파(SOFA) 규정에 따라 주한미군 보호 대책을 긴박하게 서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날 황교안 권한대행과 트럼프 대통령 간에 통화가 이뤄졌다.

이렇게 기정사실이 됐던 사드 배치에 대해 뒤늦은 진상 조사가 미국에 어떤 '사인'을 줄지는 뻔하다. 청와대가 사드 논란을 다시 불붙였을 때는 한·미 동맹의 균열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했다. 국민에게 이를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야 했다. 하지만 사드 소동을 촉발시킨 뒤 기껏 내놓은 발언이 너무 창피했다. "사드 진상 조사는 순전히 국내 조치임을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은 이번 조치를 이해하고 신뢰한다고 했다"…. 외교적 수사를 우리 식으로만 해석하는 능력이 놀랍다. 그러면 미국이 "한국 정부가 하는 짓이 터무니없고 이해할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해올 줄 알았나.

국익을 위한 자주 외 교에 반대할 이는 없다. 우리에게 그런 외교 역량이 있다면 말이다. '사드 소동'만 해도 전술 부재와 미숙한 외교 기술을 모두 보여줬다. 그런 능력으로 너무 쉽게 큰일을 벌이면 미국은 우리를 배제한 채 한반도 문제를 결정할지 모른다. 우리의 대통령이 당당한 소신을 갖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소신의 관철이 나라 앞날에 결코 그림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8/20170608029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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