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테제공동체서 30년… 유일한 한국인 신한열 수사]

초교파 그리스도교 수도원
기부금·후원금도 받지 않고 30개국 80여명 자급자족 생활
책 '함께 사는 기적'에 담아 "평생 배우는 사랑의 학교"
 

"어느 날 연세 많은 선배 수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서둘지 말게. 이 많은 형제를 다 알아가는 데는 평생의 시간이 주어져 있으니까.' 초반에 제가 빨리 수도 생활을 익히고 싶어 서둘렀던 모양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둘지 말라'는 의미를 깊이 깨닫습니다.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요."

프랑스 테제공동체에서 30년째 생활하고 있는 신한열(55) 수사(修士)가 펴낸 '함께 사는 기적'(신앙과지성사)은 '느림의 미덕'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책 출간에 맞춰 귀국한 신 수사를 16일 만났다.
 
테제공동체 생활 30년째인 신한열 수사는 미소가 일품이다. 공동체 생활이 주는 기쁨이 그대로 배어난다. 개인 재산을 갖지 않는 공동체 전통에 따라 신 수사 책 판매 수익금도 공동체로 보내지게 된다.
테제공동체 생활 30년째인 신한열 수사는 미소가 일품이다. 공동체 생활이 주는 기쁨이 그대로 배어난다. 개인 재산을 갖지 않는 공동체 전통에 따라 신 수사 책 판매 수익금도 공동체로 보내지게 된다. /오종찬 기자
테제공동체는 1940년 스위스 개신교 목사 아들인 로제(1915~2005) 수사가 세운 초교파적 그리스도교 수행 공동체. '그리스도인이 벌이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로제 수사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 공동체를 설립했다. 지금은 개신교, 천주교, 정교회 구분 없이 세계 30개국 출신 80여 명이 자급자족하며 독신 수도 생활하고 있다. 1988년 테제공동체 생활을 시작해 1992년 종신서약을 한 신 수사는 이 공동체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신 수사의 묘사를 따라 테제공동체의 풍경을 살펴보면 '이상적 공동체'를 발견하게 된다. 우선 이 공동체에는 '없는 것'이 많다. 울타리, 국경, 교파, 게시판, 직책, 개인 통장, 순명(順命) 서약…. 재산은 공동으로 관리하고 기부금과 후원금도 받지 않는다. 대신 도자기와 음반, 서적을 제작·판매해 자급자족한다. 대부분 휴대전화도 없다. 간혹 유산을 받는 회원이 있으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쓴다. 북한에 보낸 옥수수와 밀가루 각 1000t도 이렇게 마련했다. 설립 초기 박해받는 유대인을 시작으로 지금도 수단과 우크라이나 등의 난민을 거두고 보살펴 정착을 돕는다. 본인들은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지만 수사들 스스로는 '가난' 대신 '단순 소박함'이라 하고, "남에게 재정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개인이나 공동체에게 큰 은총"이라 말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권위는 있어도 권위주의는 없다. 설립자 로제 수사는 원장을 '일치의 종' '더 많이 듣는 사람'이라 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가 "아무도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모두가 복종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서로를 거울 삼아 살아간다.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한 분' 때문에 모여서 평생을 평화롭게 사는 것을 수사들 스스로도 '함께 사는 기적'이라 부른다.
 
테제공동체에서는 하루 3차례 모든 수사가 참석하는 기도회가 열린다.
테제공동체에서는 하루 3차례 모든 수사가 참석하는 기도회가 열린다. /신한열 수사 제공

생활을 극도로 단순 소박하게 정리한 이유는 수도 생활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신 수사는 "수도 생활은 뒤돌아보지 않고 지금, 당장, 여기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방법은 기도와 침묵 그리고 기다림이다. 기도 역시 서두르지 않는다. 신 수사는 "기도하다가 막히면 그냥 기다린다"고 했다. "기도는 무엇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그 빈자리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 찾아오시죠."

책에는 심각한 종교 인구 감소 현상을 겪고 있는 유럽 개신교와 천주교 실태도 묘사된다. 성직자도 줄어들어 몇 개 교회 혹은 성당을 통폐합하는 '구조 조정'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반면 테제공동체에는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연간 10만명씩 찾아온다.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는 청년들이다. 신 수사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면서 "종교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했다. "몸(종교 인구)이 가벼우면 오히려 본질에 더 집중할 수 있지요.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이 신앙인답게 제대로 살았는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지요."

1년에 한 번씩 한국을 찾는 신 수사는 언젠가 서울 거리에서 본 간판 이야기를 했다. "'가벼운 몸, 풍성한 삶'이란 간판을 봤어요. 속으로 '어떤 교회가 저런 멋진 글을 적었을까'하면서 자세히 보니 비만 클리닉이었어요(웃음). 신체의 비만뿐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도 가볍게 비웠을 때 삶은 더욱 풍성해지겠지요."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9/20170519000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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