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앞의 自主, 듣기만 해도 가슴 뛴다
强者의 힘 논리 앞에서 文 대통령은 어떻게 "No"라는 국가 의지를 관철할 것인가
 

박정훈 논설위원
박정훈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을 전임자들과 차별화할 키워드 하나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책에서 "미국에도 'No'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썼다. 선거 때는 "트럼프·시진핑 앞에서 'No'라 말할 수 있는 자주적 대통령"을 구호로 걸었다. 강대국 앞의 자주(自主)라니,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떻게 'No'를 관철하겠다는 것일까. 어떤 복안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외친 것이 1989년이었다. 그는 일본의 산업 기술을 대미(對美) 카드로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일본이 컴퓨터칩 공급을 끊으면 미국은 꼼짝 못 한다고도 호언했다. 이시하라의 주장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렇지만 기술력이 갖는 전략적 가치를 간파한 점에서 통찰력 있었다.

그때 이시하라가 큰소리치던 '반도체 패권'이 지금 우리 손에 넘어와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세계 시장 점유율은 70%가 넘는다. 낸드플래시도 50% 가까운 점유율이다.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삼성·SK하이닉스의 반도체 없이 글로벌 제조업이 굴러가지 못한다. 전 세계가 한국산 반도체에 목매는 초유의 상황이 펼쳐졌다.

반도체는 돈만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니다. 돈벌이 차원을 넘어 국가 안보와 더 큰 국익에 기여한다. 얼마 전 북핵 선제 타격 논란 때가 그랬다. 당시 전쟁설이 무성했지만 경제계에선 애초부터 가능성이 작다고 보았다. 산업 관점으로만 보아도 선제 타격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런 논리다. 삼성·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은 북한 방사포 사거리 안에 있다. 만에 하나 두 공장의 생산 라인이 멈춘다면 이는 글로벌 경제 재앙을 뜻한다. 아무리 트럼프라도 경제 패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반도체 공장이 전쟁 억지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기업들이 이룬 산업적 성과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의 사드(THAAD) 보복이 이 정도에 그친 것도 우리가 산업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국산 반도체와 부품·소재에 의존한다. 그래서 전면전(全面戰)으로 확대하지 못하고 관광 같은 주변부만 건드렸다. 산업 기술의 우위가 보복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냈다.

기업에 국적(國籍)이 없다고 한다.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전략 산업에서 국적은 여전히 중요하다. 글로벌화 속에서도 모든 선진국이 핵심 기술의 국적을 따지는 '기술 민족주의'로 치닫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실에서 취임 후 첫 기자회견 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이 '반도체 굴기(�起)'에 혈안인 것도 그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미국 정부는 마이크론 반도체가 중국에 팔리는 것을 불허했다. 웨스팅하우스 원전 부문이 넘어가는 것도 막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심지어 철강 수입에까지 안보 논리를 들이댔다.

한 국가가 보유한 산업·기술 경쟁력은 그 나라의 안보 자산이다. 한국 반도체는 미국의 첨단 무기 체계에도 광범위하게 들어간다. 물론 이시하라 주장처럼 실제 협상 테이블에서 반도체 카드를 흔들 순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강대국들이 한국 반도체에 의존한다는 사실 자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자산이 된다. 든든한 히든카드 하나를 쥔 것과도 같다.

반도체에만 국한되는 논리가 아니다. 일본이 트럼프의 통상 공세를 누그러트린 것은 산업계 덕이었다. 도요타자동차 등이 아베 방미 길에 건넨 두둑한 선물 보따리가 먹혀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눈을 부라리던 트럼프도 삼성이 투자를 약속하자 "생큐"를 연발했다. 이게 기업의 힘이다.

선거가 끝나고, 이제 문 대통령은 현실적 문제와 대면하게 됐다. 말로 "No" 하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로 'No'라는 국가 의지를 관철하기는 보통 일이 아니다. 트럼프에게도, 시진핑·아베에게도 도덕론은 통하지 않는다. 이들과 마주할 문 대통령은 갑갑한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

그럴 때 문 대통령이 의지할 것 중 하나가 기업이라는 국가 자산이다. 삼성·현대차 같은 글로벌 기업의 대외 역량은 정부 부처를 웃돈다. 국익이 걸린 국가 이슈에선 기업 힘도 빌려다 써야 한다. 강한 글로벌 기업들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협상력이 생긴다.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영향력이 클수록 정부 협상력도 커진다.

유감스럽게도 문 대통령에겐 '기업이 자산'이라는 관점이 보이지 않 는다. 온통 재벌 개혁 쪽에 방점이 찍혀 있다. 재벌의 불법·탈법은 수술해야 하지만 이게 기업 정책의 전부일 수는 없다.

대기업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고 활용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대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더 활약할 수 있도록 최소한 족쇄는 채우지 말아야 한다. 이제 곧 강대국의 힘 논리 앞에 설 문 대통령에게도 기업들의 힘이 절실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1/20170511033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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