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源

그린랜드를 최초로 횡단한 F 난센은 흔히 북극 탐험가로 알려져 있지만 난민을 구제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세계인권사의 거목이다. 그는 난민들에게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구호 프로그램을 운영하다가 1922년 국제연맹 난민담당관이 되었다. 이후 동유럽에서 러시아 난민들이 국적 박탈로 인해 구금과 추방의 위기에 처하자 신분보장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른바 난센 여권(Nansen passport)을 창안했다. 일종의 난민 신분증명서인 난센 여권은 러시아 난민이 동유럽 국가로부터 체재허가와 노동허가를 받거나, 제3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그 혜택을 받은 난민이 무려 150만명이나 되었다.

장길수군 가족에 뒤이어 탈북자 25명의 집단 망명이 성공하면서 10여년 이상 남북한, 중국, 러시아 등이 공공연한 비밀로 덮어두었던 탈북자 문제는 국제 인권문제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중국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탈북자 전원을 제3국을 통해 한국으로 보내 주었지만 탈북자들에 대한 난민지위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한국에는 ‘실리’를, 북한에는 ‘명분’을 주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의식하면서도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탈북자 지원에 대한 강경노선을 발표하는 중국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다.

중국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탈북자가 증가하자, 탈북자 문제는 북·중 간의 일이며, 다른 나라가 이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주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북·중 밀입국자 송환협정, 국경지역업무 협정 등에 의거하여 탈북자 강제송환과 북한의 감시·감독을 정당화했다. 한편 난민관련 협약과 관례의 허점을 이용하여 탈북자 문제가 이슈화되는 것을 차단했다. 중국은 난민을 판정하는 1차적 권한이 체재국에 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관여를 내정간섭이라고 못박았다. 또한 난민협약이 난민을 ‘인종·종교·국적·특정 사회집단 소속·정치적 이유 등으로 국적국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반면,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배고픔 때문에 북한을 탈출하므로 난민이 아닌 ‘식량 유민’이라고 주장해 왔다.

최근 탈북자 규모가 수십만명에 이르면서 그 탈출 동기도 다양해졌고, 이들의 비참한 실상이 국제사회에 알려져 탈북자 문제는 제2라운드에 진입했다. 중국이 종전처럼 국제여론을 무시하고 탈북자를 강제 송환하고 감시를 강화할 경우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을 곤경에 빠뜨렸던 인권 탄압 시비가 재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고 탈북자들에게 난민 지위를 주면 탈북자들이 봇물처럼 중국으로 유입되어 중국의 치안이나 사회 불안이 우려된다. 외부적으로도 50년간 혈맹관계를 유지해 온 북한과의 갈등도 불가피할 것이다. 때문에 중국은 새로운 선택을 거부하고 종래의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러나 탈북자 문제는 이미 국제화됐다. 국제 인권단체 등이 탈북자에 대한 난민지위 확보를 강력히 촉구하는 것은 80년전 난센이 ‘식량 지원’에서 ‘신분 보장’으로 난민문제의 해결책을 찾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변보장 없는 식량지원이나 단순 구호는 일시적인 것이며 난민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중국이 주장하는 ‘조용한 외교’로 수십만명으로 추정되는 탈북자를 보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이들을 대책없이 방치할 경우 베트남의 ‘보트 피플’처럼 탈북자들은 중국과 러시아 동남아 일대를 떠도는 ‘랜드 피플(Land People)’이 돼 통제 불능의 유랑 집단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정부는 UN과 국제 인권기구들과 연대해 중국에 UN 긴급수용시설을 설치함으로써 해법을 찾아야 한다. 동시에 국제적인 효력을 가지는 신분증명서를 발급해 탈북자들이 원하는 국가에 정착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 ‘21세기 난센 여권’은 탈북자들의 신변을 보장하고 삶의 기회를 주는 희망의 등불이 될 것이다. / 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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