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개발 탓에 결딴난 남북관계, 南의 30년 대북 정책도 일부 책임
퍼주기나 초강경 노선 모두 無效… 이산가족 어르신 그 사이 세상 떠나
상호 불가침 합의와 화해 이끌어낸 노태우 정부의 선견지명 돋보여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 프롤로그. 완벽하게, 남북 관계는 결딴났다. 교류 협력은커녕 대화조차 없다. 모든 통신선도 단절되었다. 확성기 비방 방송만이 남북을 오갈 뿐이다. 북한의 핵개발 탓이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이렇게까지 흘러온 데에는 우리의 대북 정책도 한몫을 했다.

# 선견지명(先見之明).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과 '북방 정책'으로 남북 관계의 역사적 전환을 만들었다. 아직 냉전 시절이었지만 미리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움직였다. 북한을 단순한 적이 아니라 통일을 향한 동반자로 규정했고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도 성사시켰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의 화해와 상호 불가침, 교류 협력을 규정한 기본합의서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탈냉전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능동적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과의 수교가 없었더라면 우리 경제는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획기적 대북 정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적대적 대결의 남북 관계만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 좌충우돌(左衝右突). 취임사에서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이라며 전향적 선언을 했던 김영삼 정부는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할 수 없다고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불과 100일 후였다. 기업의 북한 투자도 장려되었다가 방문조차 불허되기를 반복했다. 인도적 지원조차 금지와 허용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도대체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금만 유연하게 개입 정책을 썼더라면 고난의 행군을 겪던 북한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붕괴하기만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서 통일 대통령이 될 상상만 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었다.

# 다다익선(多多益善). 남북 관계 발전은 김대중 정부의 최고 목표였다. 방법론으로 접촉을 통한 변화를 채택했다. 좀 더 자주 만나고 가능한 한 많이 주다 보면 북한이 변화하리라고 믿었다. 대북 정책 추진 원칙인 '화해 협력의 적극 추진'은 '퍼주기'를 해서라도 관계 개선을 하겠다는 공개적 선언이었다. '퍼주기' 비판에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애초부터 '퍼주기'를 작정한 것이었다. 그렇게 지원과 협력을 쌓아 가면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간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진한 기대였다.

# 전철답습(前轍踏襲). 노무현 정부는 그저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을 이어갔을 뿐이다.

# 자승자박(自繩自縛). 시작은 호기로웠다. 기업인 출신답게 이명박 대통령은 실질적인 대북 정책을 선언했다. 남북 관계에서도 생산성을 내세웠다.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풀겠다고 했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하자 '5·24 조치'를 내걸었다. 정부 차원의 대응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시인할 리조차 없는 북한에 사과와 재발 방지까지 '5·24 조치'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너무 큰 칼을 너무 높이 든 셈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고 결과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그렇게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은 끝나고 말았다.

# 교각살우(矯角殺牛). 남북 사이 신뢰가 중요하다며 박근혜 정부는 출범했다. 신뢰는 쉬운 사안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북핵 문제를 오히려 전면에 내세웠다. 선이후난(先易後難)이 아니라 선난후이(先難後易)였고, 그래서 '대략난감'이었다. 급기야 개성공단마저 폐쇄했다. 개성공단 임금이 얼마나 핵 개발에 사용되는지도 모르지만, 그 돈 없다고 핵 개발 못할 북한이 아닌데 말이다. 이로써 한반도는 냉전 시절로 돌아갔고, 지난 30년의 대북 정책은 도로무공(徒勞無功)이 되고 말았다.

# 에필로그. 3378명.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작년 한 해 동안의 사망자 수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만 돌아가시는 게 아니다. 남북 관계가 이런 사이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신다. 생전에 가족 얼굴 한번 보자는 그 작은 소망 하나 못 이루고, 애통하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12/20170212017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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