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상 정치부 차장
정우상 정치부 차장

국회 사무처 명의로 발간된 '연구보고서' 몇 권이 국회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기본소득제 이해와 정책 수요 조사' 같은 보고서는 내용의 충실성과는 별개로 주제 자체는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평화협정의 가능성과 의제'라는 보고서는 한눈에 봐도 국회의 연구용역비를 목적으로 급조된 듯한 주제였다. 1건당 수천만원에 달한다는 국회의 연구용역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확인하고 싶어 청소 직원이 쓰레기통에 버리기 직전에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평화협정을 이야기하면 아직 분단 논리에 젖어 극단적 반북(反北)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다. 주한미군 철수를 통해 적화통일을 노리는 북의 기만전술이라는 주장을 편다." 보고서는 "이들에게는 분단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올바로 바라볼 식견이 없다"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는 한반도를 중국과 러시아 미사일이 겨냥하는 위험지대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국회 보고서. /조선일보 DB
국회 보고서. /조선일보 DB

'평화협정'은 논쟁적 주제다. 현재의 정전협정을 종식하는 의미의 평화협정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정전협정조차 밥 먹듯 위반하는 북한은 평화협정을 주한미군 철수 등 한·미 동맹을 파괴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이는 과거였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김정은은 지난 5월 당대회에서 "미국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조선에서 침략 군대와 전쟁 장비들을 철수시켜야 한다"며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평화협정을 입에 달면서 한편에선 핵 도발을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평화협정을 주장하면서도 비핵화를 전제로 내건 국내 보수 세력은 사실상 평화협정에 대한 의지가 없다"며 오히려 우리 내부로 비판을 돌린다. 북핵 폐기 요구, 천안함 폭침 같은 도발에 대한 대북 제재를 반북(反北), 반(反)평화로 규정한다. 보고서는 이어 "사상 유례없는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북은 수소폭탄과 SLBM(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통해 자신들의 핵 억지력을 과시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검증도 안 된 북의 일방적 주장인 '수소폭탄' 개발을 인정했고, 핵무기 개발은 미국 핵무기에 대한 자위 수단이라는 시각을 그대로 인용했다.

'평화협정' 공세를 진짜 평화로 생각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라고 치자. 그러나 이런 연구에 '정책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세금이 지원되고, '국회사무처' 명의의 보고서로 유통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 연구를 하고 싶은 정당이 있다면 자기 이름 내걸고 자기 돈 들여 하면 된다.

국회의 연구용역 보고서는 재탕과 표절 문제도 심각하다. 19대 국회에서 주문했던 정책 연구용역 중 60% 이상이 다른 연구를 짜깁기하거나 재탕, 삼탕했다는 조사도 있다. 국회는 배짱이 좋다. '세금 낭비' 비판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런 보고서는 무관심 속에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게 차라리 낫다. 그러나 외국의 어느 싱크탱크에서 한국 의회의 공식 입장으로 이 보고서를 인용한다면 그때는 진짜 '사고(事故)'가 될 수도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15/20161215030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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