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일 언론인[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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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정치인들도, 오피니언 리더들도 지금은 비상시국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북한 핵·미사일 사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왜 비상시국인가? 핵보유국과 비핵국은 게임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앞선 비상 상황이 있다. 이런 상황이 왜 왔는지에 대해 국민적, 보편적 인식이 없는 게 그것이다. 이게 없으니까, 초당적으로 합치된 위기 진단이 없으니까, 거국적 위기 처방도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핵 재난에 몰린 까닭은 하나다. 우리가 북한 권력의 본질과 속성과 의도를 잘못 짚고 매사 너무 안이하게 바라본 탓이다. 이 실패를 둘러싸고 정계와 이념 판에선 "그건 햇볕 탓이다" "아니, 강경 탓이다" 하며 떠넘기기 논쟁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강경'으로 몰린 쪽 역시 김일성·김정일·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하지 못해 안달을 했던 것만은 '햇볕' 쪽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말이 '강경'이지, 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 정권도 다 '통일 업적'을 남기기 위해 회담·교류·화해·협력의 시도를 안 한 게 아니다. 이 노력에선 보수 정권들이나 진보 정권들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의도가 달랐을 수는 있지만, 양쪽이 내걸었던 대전제도 같았다. 훈풍을 불어넣어 주고 물질적 인센티브를 주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정권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고 전제한 게 바로 그것이다.
 

'핵 狂人' 앞에 벌거벗은 우리의 운명. /그래픽=김성규 기자[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핵 狂人' 앞에 벌거벗은 우리의 운명. /그래픽=김성규 기자[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숱한 사회과학자, 관료, 정치인, 대기업, 문화인, 언론사들이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온통 다 북한에 돈맛을 들여주면, 살살 달래주면, 행패 부리는 대로 퍼주면, 비위를 맞추고 얼러주면, 정상회담과 협상을 거듭하다 보면, 이윽고 저들의 마음과 행태가 물러져서 공존·교류·협력으로 가는 프로세스를 열고야 말 것이란 전망에 베팅을 했었다. 이 시류에 편승하지 않으면 '반(反)통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진보 쪽이야 당연했지만, 눈치 빠른 금수저·리무진 보수들도 다투어 평양 줄 대기와 김정일 알현에 연연했다.

이런 좌·우의 '햇볕 한철'은 그러나 말짱 꽝으로 드러났다.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장밋빛 가설(假說)에 북한이 결국은 올라타 줄 것이라고 물색없이 과신했다. 꿈도 야무진 꿈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바보인가, 우리 입맛대로 놀아주게. 북한의 개혁·개방은 우리가 볼 때는 합리적이지만, 북한은 그걸 자기들 녹이려고 하는 짓으로 봤을 것이다.

그래서 북은 우리의 각종 '햇볕'을 엎어치기 하는 전술로 나왔다. 회답과 교류를 통해 저들은 우리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은 채 돈만 싹 빼먹었다. 남·남 틈새를 벌려놓고, 핵·미사일 개발의 자금과 시간을 벌었다. 우리는 머리 좋은 수재(秀才)가 제 꾀에 넘어간 격이 되었다. 언젠가 현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란 기구의 세미나에 갔는데, 거기서도 어떤 공부 많이 한 교수가 공존·교류 청사진을 어찌나 정교하게 짜서 발제하는지, 그 솜씨엔 무척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저 시나리오에 맞춰주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 있나?"

북은 우리 시나리오에 절대 맞춰주지 않는다. 그랬다간 그들의 세습 천황제-사이비 종교 체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저 체제는 북한 주민의 눈과 귀와 입과 영혼에 자물쇠를 채워야만 유지될 수 있다. 공존·교류·개혁·개방은 그 잠금장치를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북은 우리 시나리오를 받으려야 받을 수 없다. 북에 중요한 건 세습 천황제-사이비 종교 체제의 영구화이지, 우리가 바라는 '문명 한반도'가 아니다.

이쯤 됐으면 한국도 미국도 이젠 꿈 깨야 한다. 남북대화도, 6자회담도,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도, 대화에 의한 북핵(北核) 폐기를 이끌어내진 못했다. 이래서 나온 게 북한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론이다. 미국의 한층 강화된 김정은 돈줄 죄기와 박근혜 대통령의 '반(反)인륜적 통치 종식(건군 68주년 기념사)'론이 그걸 말해준다. 이게 100% 유효하리라고 예단할 순 없지만.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동맹의 '북한 레짐 체인지' 대응이 맞붙는 이 상황은 그래서 '죽기 아니면 살기'다. 이런데도 우리 일부는 김정은 핵·미사일엔 '무사태평'이면서 그 방어 수단엔 반대다. 핵·미사일을 든 상대방은 "죽을래, 손들래?"라며 공격하는데, 우리 내부는 정리정돈조차 안 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됐었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역대 우리 대북 정책은 왜 실패했는지부터, 보수도 진보도 솔직하게 자성해 볼 일이다. 그래야 그나마 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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