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동반자로 규정한 1988년 7월7일의 '7·7선언'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교역 성사… 올해 기념일에도 정부·야당 무심
통일 준비가 중요하다면서 기념은커녕 기억조차 안해서야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조동호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지난주 목요일, 그러니까 7월 7일은 남북관계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날이었다. 28년 전인 1988년, 남북관계의 본질적인 변화를 불러온 '7·7선언'이 발표됐기 때문이다.

그날 오전 9시, 노태우 대통령은 상기된 표정으로 생중계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앞에서 7·7선언을 읽어 내려갔다. 정식 제목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이었다. 길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내용은 엄청났다. 북한을 단순한 적이 아니라 통일을 향한 동반자로 규정했던 것이다. 6개 실천조항도 포함됐다. 예컨대,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이산가족 서신 왕래 및 상호방문 적극 지원, 남북교역 허용 및 민족 내부거래 간주, 북한과 미·일과의 관계개선 협조.

지금으로서는 당연하고 익숙한 내용이지만, 그때로서는 획기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북괴(北傀)'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고,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구호가 난무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더욱이 북한 공작원에 의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한 KAL기 폭파사건이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세계적으로도 냉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우리에게 중국은 중공(中共)일 뿐이었고, 소비에트 연방은 아직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는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을 감지하고 있었다. 조만간 이념과 체제의 시대는 끝날 것을 예견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북방정책으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수교를 추진하면서, 7·7선언으로는 남북관계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적대에서 신뢰, 대결에서 협조, 경쟁에서 동반 관계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냉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제적이고 능동적으로, 그리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대단한 인식의 전환이었고, 우리의 대북·외교정책 역사상 최고의 백미였다.

당연히 국민 모두는 7·7선언을 환영했다. 당시 석간이었던 동아일보의 1988년 7월 7일 자 사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북한은 이제 적이 아니다. 대결하고 봉쇄 고립화할 상대가 아니다. 남북은 적대관계 아닌 동반자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다음 날 한겨레신문 사설 역시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개를 가능케 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고 썼다. 조선일보 만평은 7·7선언 덕분에 남북 주민이 서로 오고 가는 한반도 그림을 크게 그리고는 그 밑에 한 줄 적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구나."

실제로 7·7 선언은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1989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교역이 성사됐다. 1990년에는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고위급회담이 개최됐다. 평양과 서울에서 통일축구대회도 열렸다. 1991년에는 아예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남북 단일팀을 보냈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도 이루어졌다. 1992년 남북은 상호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대해 규정한 합의서를 발효시키기도 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7·7 선언이 없었더라면 남북 정상회담도 있을 수 없었다. 일체의 경협은 물론이고, 지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북한은 오직 무찔러야 할 적으로만 남아 있었을 테니까.

통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있는 법이다. 통일정책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결국 우리의 진정한 통일정책은 7·7 선언으로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실제로 7·7 선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우리는 멀지 않아 하나의 나라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조용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많은 통일운동단체들도 그랬고, 화해협력의 대북정책을 주장하는 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청와대와 통일부도 무심했다. 통일은 대박이라면서, 통일 준비가 중요하다면서, 7·7 선언을 기념은커녕 기억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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