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낮 12시25분께(필리핀 현지시간)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안으로 보라색 대형 버스 한 대가 앞 뒤 경찰 호송차와 함께 미끄러져 들어왔다.

지난 14일 주중 스페인 대사관으로 쥐약을 가슴에 품은 채 뛰어 들어갔던 탈북자 25명을 태우고 공항 부근 아길라르 기지에서 온 차였다. 일반 승객들이 모두 대한항공 KE-622편에 타고 난 뒤 출발시간인 낮 12시40분께 갑자기 한국대사관 관계자들과 대한항공 직원들이 서로 바삐 연락을 주고 받는가 싶더니 탈북자들이 필리핀 정부 관계자들과 함께 탑승구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가 지난 15일 이들이 베이징을 떠나 마닐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닐라로 향한지 꼭 3일만이었다. 스페인 대사관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대부분 겨울옷 대신 검정색 양복이나 비교적 산뜻한 색깔의 남방으로 갈아입은 이들은 표정만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나이 어린 유 철(13.유동혁씨 아들)군만 자신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부지런히 눌러대는 남쪽 기자들에게 한번 빙긋 웃어줬을 뿐이었다.

일등석 12석을 포함, 376석 규모인 KE-622 보잉 777 비행기에서 이들은 맨앞 비즈니스석 바로 뒤 '프레스티지(우대)석' 26석중 25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다른 객석과 달리 좌석마다 TV 모니터가 설치돼있는 이곳에서 탈북자들은 연방 신기한 듯 이것저것을 만져보고 아이들 같은 경우는 뒤쪽 일반석에 앉아있는 남쪽 승객들을 힐끗 쳐다보는가 하면 좌석 사이 통로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했다.

여자아이들이 비교적 활발하고 야무진 반면 이 일(49.함경북도 온성 출신)씨 아들 대성(16)군과 최병섭(52.공장 근로자. 온성 출신)씨 아들 철만(17)군 등 남자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성군이 말문을 연 것은 비행기가 이륙한 오후 1시께로부터 2시간여가 지난 뒤. '기분 좋으니?'라고 묻는 기자에게 대성군은 '저는 중국말은 조금 할 줄 아는데 조선말은 잘 못합네다'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난 98년 탈북했다는 대성군은 이번에 아버지와 어머니 김용숙(44)씨, 형 대갑(19)군, 여동생 형심(14)양 등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10여분간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던 대성군은 기자가 '그럼 중국어를 한번 해보라'고 하자 자신있게 '니하오'라고 소리쳤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TV 모니터를 만지는가 하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활기차 보였지만 이 성(43.공장근로자.함북 청진 출신)씨는 북에 두고온 아이들 생각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이번에 부인 김용희(40)씨와 막내딸 진화(7)양만 데리고 왔을 뿐 12살과 17살 먹은 오누이를 북에 두고 왔다는 것. '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지 않습네까. 통일돼야 볼 수 있갔죠?' 하지만 이 씨는 개인적으로 치과 공부를 해왔다며 한국에 가면 치과나 사진 기술을 살려보겠다고 계획을 털어놨다.

모든 가족을 모두 데리고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최병섭(52.공장근로자.온성 출신)씨는 지난 97년 탈북 이후 중국에서 받은 차별과 갖은 고생을 다시 회상하며 착잡해하기도 했다. 최씨는 '중국에서 차별 받다 보니까 역시 고국 땅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습니다'라며 '한국에 가면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서 공부시키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고향 함북 무산에 70대 노부모가 남아 있다'면서도 애써 담담한체 하던 유동혁(45.치과의사.무산 출신)씨는 몸이 아프다며 괴로워했다. '못 먹어서 그런지 위와 간이 좋지 않습네다. 하지만 한국 의사들이 주는 약 먹고 많이 낳았습네다' 아이들을 모두 데려왔다는 유씨는 자신의 이름이 애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명이라며 '어차피 밝혀질 이름 굳이 숨길 필요가 있습네까'라고 되물었다.

지난 97년 탈북했다는 유씨는 탈북 동기와 관련, '식량난도 식량난이지만 자유가 그리워서 탈북했다'고 말했다.

기자들의 취재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은 일반석에 앉아있던 기자들이 탈북자들쪽으로 다가갈 때마다 기자들을 끌어내느라 진땀을 뺐다.

대한항공 여승무원인 오주연씨는 '기자들이 피곤해하는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퍼붓는 것은 그들을 괴롭히는 것 아니냐'고 취재진들에게 볼멘 소리를 하면서도 '(탈북자들이) 이렇게 친절할 줄은 몰랐다. 굉장히 예의가 바르다'고 신기해했다.

오씨는 '탈북자들중 두통을 호소한 분들이 몇분 있다'며 '기내식의 경우 어른들은 모두 잘 먹는 반면 아이들은 피곤하다며 남기기도 했지만 특별히 이들을 위해 마련한 케이크는 모두 잘 먹었고 일부 어른들은 맥주와 포도주를 마시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후 5시10분 그토록 그리던 남쪽 땅이 보이는 순간 탈북자들의 얼굴은 온갖 감회로 가득차 있었다. 대한항공측이 특별히 마련한 케이크 한조각을 먹다 갑자기 눈물을 쏟기도 했던 유동혁씨의 딸 진옥(15)양도 신기한 듯 비행기 창밖을 쳐다보며 조그맣게 소리를 질렀다. '한국이다' '이게 남조선입네까?' '저기가 서울입네까?' 김 향(15)양이나 이선애(16)양 등은 기자들이 질문할 때에는 '피곤하다고 하지 않았습네까. 나중에 질문 하시라요'라고 당돌하게 소리쳤지만 막상 한국 땅이 보이자 창밖과 뒤쪽 기자들을 번갈아 바라보기도 했다.

경의선을 탈 경우 불과 몇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땅을 길게는 몇 년씩 돌아 들어온 이들의 눈엔 어느덧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기자 앞에서 긴장한 채 말을 건네지 않던 탈북자들도 한국 땅이 보이고 어느덧 오후 5시21분께 꿈에도 그리던 한국 땅,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에는 뒤돌아 기자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마닐라 영종도=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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