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정치부 차장[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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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났던 중국 외교관은 "당시 김일성이 '나는 핵 개발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과 핵무기로 경쟁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나와 달리) '젊은이'는 핵 개발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젊은이는 아들 김정일이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등극한 김정일은 핵 개발에 속도를 내면서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두 차례 핵실험(2006·2009년)을 했지만, 북한 체제 보장과 비핵화를 맞바꾸려는 협상 테이블에도 나왔다. 4자회담·6자회담 등이 '핵 개발을 위한 시간 벌기'라는 비판 속에서도 열렸다. 반면 김정은은 2011년 집권한 이후 자기 입으로 "비핵화"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핵 보유'를 헌법과 당 노선에 명시했고, 두 차례나 핵실험(2013·2016년)을 강행했다. 최근에는 '5차 핵실험'까지 지시했다. 핵 보유 의지에 관한 한 김정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훌쩍 넘어섰다.

'공포정치' 방법도 김정은은 선대(先代)와 다르다. 김정일은 체제에 불만을 표시하는 일반 주민을 가혹하게 다뤘다. 그는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이라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을 때 '공개 총살'을 수시로 자행하며 민심을 통제했다. 대신 핵심 측근에게는 특권과 선물을 안겼다. 계급장을 뗐다 붙이기를 반복했지만, 함부로 측근을 죽이지는 않았다. 과거 동유럽의 독재자처럼 극단적 상황이 닥치면 측근을 중심으로 끝까지 버티겠다는 속셈이었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정반대다. 핵심 측근에겐 가혹하고, 일반 주민에겐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집권 5년 만에 벌써 측근 간부 130여 명을 숙청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측근이 뚜렷한 정치·정책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개인감정과 변덕 때문에 왕조의 '유신(遺臣)'을 죽이고 있다. 대신 일반 주민을 위한다며 물놀이장과 스키장을 짓는 '애민(愛民) 쇼'를 펼치고 있다. 주민을 공개 총살했다는 소문도 과거보다 확실히 줄었다.

김정일이 좋아서 일반 주민을 공개 총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측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민에게 냉혹했고, 일부 측근만 중용한 것은 핵심 그룹의 응집력이 '김씨 왕조' 유지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북한에는 '칭병(稱病·병이 있다고 핑계)'하는 고위직이 늘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의 칼바람을 일단 피하고 보려는 모양새다. 일부 주민은 김정은의 '고위직 숙청'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일반 주민이 김정은을 끝까지 지켜줄지는 미지수다.

김정은은 잇단 핵실험을 감행해 밖에서 닥치는 위기를 자초했다. 이런 와중에 측근들은 숙청 공포 때문에 몸을 숨긴다. 과거 몰락한 독재국가처럼 어느 순간 핵심 그룹도, 주민도 각자 살길 찾기에 바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런 김정은의 손에 핵이 들려 있다. '김정은 리스크'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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