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협정 결국 필요하나 手順 틀리면 자충수될 뿐
평화협정 약속 거듭 깬 北이 "제재 못버티겠다"고 나와야
先평화 後통일이 아니라 先통일 後평화가 해답
 

주용중 부국장 겸 국제부장[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주용중 부국장 겸 국제부장[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바둑에 '수순의 묘'라는 게 있다. 꼭 필요한 착점이라도 순서를 잘못 잡으면 패착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요즘 국내외 일각의 평화협정 논의도 수순을 한참 잘못 읽은 패착이다. 한반도에 평화협정을 포함한 평화 체제가 궁극적으로 필요하다는 데는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1991년 남북이 채택한 기본 합의서에는 '남과 북은 현 정전 상태를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북한이 1993년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으로 비핵화 약속을 어김으로써 공수표가 됐다. 2005년 6자회담의 결과물인 9·19 공동성명에도 '당사국들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 체제에 관한 협상을 시작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그러나 북한의 2006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에 이은 1차 핵실험으로 폐기됐다.

'우리가 미국 때문에 불안을 느끼니 평화협정을 맺자. 그러면 비핵화도 할 수 있다'는 북측 요구를 바탕으로 합의를 해놓으면 이를 번번이 걷어찬 당사자는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1973년 베트남 평화협정 체결로 미군이 철수하자 2년 뒤 베트남이 공산화된 것 같은 일이 한반도에서 일어나기를 제일 바란다. 하지만 이게 여의치 않으니까 국제사회의 제재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거나 또는 핵과 미사일을 몰래 개발할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로 평화협정 공세를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김정은 정권을 그간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과연 누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북한이 체제의 안전을 느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북에는 핵이 있고, 남에는 핵이 없는데도 평화협정을 맺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반역자다.

그래서 평화협정을 논의하려면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북한이 이란처럼 '국제 제재를 버티기 어렵다. 협상이 불가피하다'는 절실하고도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북한의 핵심 인사들은 핵과 미사일을 자랑하면서 하부 기관들이 국면 전환 차원에서 평화협정을 들먹이는 수준이다. 대남 선전용 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지금 한반도 정세는 핵전쟁의 문어귀에 들어섰다. 세계의 공정한 여론은 미국이 하루빨리 북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은근히 남한을 포함한 주변국을 협박하면서 자신들은 급할 게 없지만 원하면 협상장에 나서주겠다는 태도다. 이런 북한이 자기들 헌법에까지 명시해놓은 핵과 평화협정 문서를 맞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북한은 지금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북도 엄연한 핵 보유국인 만큼 군축 차원의 평화 체제를 논의하자는 꼼수를 쓸 게 분명하다.

둘째, 평화협정 당사자 문제가 정리돼야 한다. 북한은 1950년대에는 한때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자고 했으나 1970년대부터는 "미·북 양자가 주체가 돼야 한다"거나 "정전협정에 미국과 북한 중국이 서명했기 때문에 평화협정도 이 3자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형식 논리일 뿐이다. 평화협정의 무대는 한반도이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누려야 할 당사자는 남과 북이다. 남과 북의 합의를 미·중 또는 주변국이 보증하는 방안이 합리적이다.

셋째, 주한 미군은 평화협정의 의제가 아니라는 걸 북한과 중국에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북한은 틈만 나면 평화협정을 주한 미군 철수를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려 애쓴다. 하지만 북한 스스로 주한 미군 주둔을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2001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통일 후에도 주한 미군 주둔 필요성에 공감을 표시했다. 1995년엔 이찬복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중장이 "북한은 주한 미군이 무기한 주둔한다고 미국군 당국과 상호 양해한 가운데 새로운 평화 체제를 구상했다"고 했다.

이런 전제 조건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다면 지금은 평화협정을 거론할 게 아니라 대북 제재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중국이 비핵화·평화협정의 병행론을 주장하자 미국이 맞장구치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은 제재를 받게 될 북한에, 미국은 제재에 동참한 중국에 각각 립 서비스를 하는 차원이라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 머리 위에서 미국과 중국이 새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평화협정 문제에 대해서 우리 정부는 소극적인 편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평화협정을 이런 식으로 꺼낼 때가 아니라는 점을 미국에도, 중국에도 당당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 '평화는 좋은 말이니까 평화협정도 좋은 것 아니겠느냐'는 막연한 인식을 부추기려는 일부 인사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선(先)평화 후(後)통일'이 아니라 '선통일 후평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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