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컵라면이 너무 맛있다’
25명의 탈북자들은 마닐라에 도착한 다음 날인 16일부터 긴장이 풀린 때문인지 조금씩 자신의 소회를 털어놓기 시작했다는 게 보호관리를 맡고 있는 우리 측 대사관원들의 얘기다.

여섯 가족과 개인 3명(성인 14명·10대 11명)으로 짜여진 탈북자 25명은, 보호시설인 필리핀 육군본부 ‘캠프 아기날도’ 안에서는 자유스럽게 행동하고 있으며, 가족별로 배정된 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탈북자들, 여유 되찾아= ‘캠프 아기날도’에는 각종 시설이 갖춰진 군 막사가 40여개 동에 달하며, 탈북자 25명은 그 가운데 특정 막사 내의 공간을 할당받아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7일 오후에는 10대들 간에 농구시합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어른들은 각방을 오가며 담소하거나 TV시청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사량도 늘었다. 탈북자들은 공항 도착 당시 대한항공측에서 마련한 기내식을 다 먹지 못했을 정도로 긴장하는 기색이었지만 이후부터는 한 사람이 컵라면을 많게는 3~4개씩 먹을 정도로 식욕을 되찾았다. 도착 다음날인 16일 아침 식사는 계란과 간단한 샌드위치로 했으며 이후부터는 대사관측에서 마련한 한식 도시락과 된장국 외에도 라면 등의 간식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있다. 대사관측은 탈북자들에게 17일 컵라면과 일반 라면 등 긴급 식량을 추가 제공하기도 했다.

손상하(孫相賀) 대사는 “수용자들이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상당히 안도하는 분위기”라고 전하고 “표정들이 밝아지고 있으며 한국행 예정에 꽤 고무돼 있다”고 표정을 전했다.

마닐라 주재 한국대사관측도 탈북자들의 안전이 확보되고, 당초 본국 정부가 의도했던 ‘수일간 체류’를 필리핀 정부로부터 얻어낸 데 대해 상당히 고무적인 표정이었다. 탈북자들이 도착하던 15일 밤까지만 해도 언론에 대해 일절 함구했으나, 16일과 17일에는 공식 브리핑을 통해 상황을 전달했다.

탈북자 건강 ‘이상없는 듯’=탈북자들은 공식적으로 두 차례의 건강검진을 받았으나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16일 필리핀 육군 의료진들로부터 일일이 건강 점검을 받았고, 17일부터는 한국정부가 파견한 의료진으로부터 재차 검진을 받았다.

일부 탈북자들은 17일 진료 의사에게 “머리가 아프다”는 등의 호소를 했으나, 평상 수준의 통증일 뿐이라고 대사관측은 전했다. 의료진들은 18일 귀국할 때에도 이들과 동행할 예정이다. 한국 의료진 2명은(의사 박영길·간호사 김명애)은 16일 밤 10시30분쯤 필리핀 항공(PR 469)편으로 마닐라 국제공항(니노이 아퀴노 국제공항)에 도착했었다.

필리핀측의 철저한 통제 =필리핀 정부측은 그러나 탈북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꽤 신경을 쓰는 모습. 탈북자들은 현재 공식적으로 필리핀 공항의 출입국 공무원들이 관리하고 있다. 골레즈 국가안보담당보좌관(장관급)은 “그들이 공항 밖에 있긴 하지만 법적으로는 필리핀 국경을 통과해 입국한 것은 아니다”라며 “ ‘통과 여객(transit passenger)’ 신분에 불과해 아직 필리핀 공항출입국 관리 직원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육군본부 정문도 ‘일시 출입제한’ 표지판을 내걸었다. 탈북자들의 신분이 여전히 애매한 상황이고 필리핀 당국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마닐라(필리핀)=李光會특파원 santaf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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