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혁 정치부 차장[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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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미가 지난해 10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訪美)를 계기로 '북핵(北核) 공동성명'을 냈을 때 양국은 문구 조율 과정에서 상당한 밀고 당기기를 벌였다. 우리 정부는 "미국이 북핵을 '최고 우선순위(top priority)'로 다룬다"는 표현으로 '의지'를 확고히 밝혀주길 원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난색을 보였고, 결국 '최고 시급성(utmost urgency)'이란 문구로 절충됐다.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대통령이 어떤 표현을 쓰느냐에 따라 행정부의 후속 대응은 큰 차이가 있다. '최고 우선순위'는 실제 정책에 반영돼야 하는 구속력을 갖는다고 받아들여진다. 반면 '최고 시급성'은 정책적 부담이 훨씬 작다는 게 외교가의 해석이다. '좀 센 립 서비스' 정도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동성명 이후에도 미국은 북핵 문제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2. '이일대로(以逸待勞).' 중국의 북핵 담당 최고 책임자인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지난해 우리 측 대표단에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설명할 때 쓴 표현이라고 한다. 삼십육계(計) 중 하나인 '이일대로'는 '쉬면서 때를 기다려 피로에 지친 적을 물리친다'는 말이다. 중국이 미국보다 먼저 골치 아픈 북핵 문제에 돈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뜻이 없음을 돌려서 표시한 것이다.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인 '전략적 인내'에 대해 중국은 "그냥 저절로 해결되길 기다리는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난해왔다. 하지만 '이일대로'를 '중국판 전략적 인내'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

이처럼 미국·중국이 서로 등을 떠미는 사이 전 세계는 북한이 플루토늄·우라늄탄을 넘어 "수소탄 시험에 성공했다"고 떵떵거리는 모습을 신년 벽두부터 지켜봐야 했다. 미·중에는 북핵 문제에 대한 '피로증'과 '무기력증'이 퍼져 있다. 북핵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인사들 사이에서도 "6자회담을 다시 열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재개한들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북한 도발로 바뀌는 것은 안보리 성명 앞에 붙는 번호뿐" 등의 자조적인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4차 핵실험을 계기로 반짝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결국 다시 이전의 '방관 모드'로 돌아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미국은 아직 북핵이 자국 핵심 안보에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고, 중국은 북한이 괘씸하지만 체제가 흔들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전 세계 모든 현안을 놓고 전략적 우선순위를 매기는 두 수퍼 파워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런데도 우리 내부에선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왜 '창의적이고 과감하고 주도적인' 해법으로 미·중을 움직이지 못했느냐"며 무의미한 싸움 걸기나 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음 북한 핵실험은 예정돼 있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엄중한 상황을 맞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끼리 다투며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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