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추방'된 탈북자 25명의 경유를 허용한 필리 핀 정부가 이번 사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외교적으로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남북 동시 수교국인 필리핀으로서는 인도적 차원에서 탈북자들의 한국행을 적극 돕는 한편으로 북한과의 관계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에브달린 필리핀 외무차관은 15일 탈북자들을 태운 중국 항공기가 도착하기에 앞서 이들이 오는 18일까지 마닐라에 머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손상하(孫相賀) 주필리핀 대사의 요청을 거부했다.

에브달린 차관은 '그들(한국측)은 18일까지 체류할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그렇게 하도록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서 '인도적 차원에서 마닐라를 경유하도록 허용하지만 즉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탈북자들의 체류기간을 연장하려는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나 한국의 대북 햇볕정책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그래서 (한국측에)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덤터기를 쓰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에브달린 차관은 '마닐라가 경유지로 이용되도록 허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북한에 사실상 적대적인 행위를 하는 셈'이라고 밝혔다.

에브달린 차관은 손 대사의 말을 인용, 탈북자들이 필리핀을 경유하도록 하는 아이디어는 중국이 제안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필리핀에 있어 이번 탈북자들은 난민 신청자가 아닌 통과 여객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탈북자들이 마닐라에 체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이들의 난민 지위 요청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로일로 골레즈 국가안보보좌관이 이날 AFP통신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탈북자들이 3일내에 필리핀을 떠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필리핀 정부가 탈북자 체류 문제에 관한 강경 입장을 완화한 듯한 상황이 연출됐다.

공항에 직접 나가 탈북자들을 만난 골레즈 보좌관은 '안전상의 이유때문에 그들이 머물 장소를 밝힐수 없지만 모처에 머문 뒤 3일내로 떠날 것'이라면서 탈북자들이 이민국 요원들과 군, 경찰에 의해 안전한 장소로 옮겨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탈북자들의 서울행과 관련, 한국측의 입장을 배려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는데, 이같은 상황 전개는 필리핀 정부가 탈북자 처리를 놓고 한국 및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고려, 고심을 거듭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마닐라 교도=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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