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 경비를 맡고 있던 중국 경찰과 헌병들이 15일 탈북자들을 태운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들이 대사관을 빠져나간 후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다. /北京=AP연합

한국으로의 망명을 위해 베이징의 스페인 대사관에 집단 진입했던 탈북자 25명은 하루 만에 자신들의 뜻을 사실상 이루게 됐다. 이들은 대사관 진입 27시간 만에 서울행의 첫걸음인 ‘제3국 출국’을 위해 스페인 대사관을 나왔고, 이어 중국 남부 푸젠성(福建省)을 향한 비행기에 모두 올라탈 수 있었다.

◆ 베이징 출발 =이들의 대사관 출발은 중국 공안당국의 철저한 보안조치 속에 순식간에 이뤄졌다. 사건발생 직후부터 스페인 대사관 앞의 2차선 도로 300m 가량을 봉쇄했던 중국은 15일 낮 12시(한국시각 오후 1시)쯤부터 움직임이 빨라졌다.

스페인 대사관에서 모종의 조치가 있을 것이란 외교 소식통들의 전언에 이어, 대사관 내부에 있던 중국 무장경찰대 관용 승용차 7대가 갑자기 일렬로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전세계 언론들은 이들 차량에 25명의 탈북자들이 타고 있는지 주목했으나, 일단 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12시40분쯤에는 이들 차량의 일부가 되돌아오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로부터 약 20분쯤 후, 2대의 미니밴을 가운데 두고 이들 무장경찰대의 승용차 3~4대가 비상등을 켠 채 대사관 정문을 빠져 나오더니, 길 양편에 대기중이던 전세계 기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대사관 옆 골목길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골목길은 접근 금지선으로부터 약 100m 가량 떨어져, 이들 차량에 정작 탈북자들이 타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던 외신기자들은 취재가 원천봉쇄되고 말았다.

이들은 대사관을 출발해 곧바로 베이징 수도공항에 도착, 일단 푸젠성(福建省)으로 향하는 국내선 항공기에 탑승한 뒤, 푸젠성에서 국제편으로 갈아타고 이날 밤늦게 필리핀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

스페인 대사관측은 이들이 대사관을 떠난 뒤 기자설명회를 가질 것으로 알려졌으나, 특별한 해명 없이 설명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인 대사관 관계자는 개별 전화통화에서 “오늘 오후 대사관을 떠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앞서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는 오전 11시(한국시각 낮 12시) 인민대회당에서 전인대(全人大) 폐막 기자회견을 갖고, 탈북자 문제에 대해 “관련 당사국들이 이미 합의에 도달했다. 아주 빨리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이날 중 출국이 이뤄질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 도착 준비에 바쁜 마닐라 =탈북자 25명은 이날 밤 늦게 필리핀 마닐라의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정부 관계자들은 15일 오후부터 이들이 마닐라로 올 것임을 확인했다. 이들은 “탈북자들이 마닐라에 도착하면 공항측 관계자가 이들의 입국수속을 대행해주는 사이 공항 내 모처에서 보호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관계자들은 또 이들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외부인과 접촉이 금지된 채 엄중한 경호를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닐라의 한국대사관측은 작년 6월 장길수군 가족 망명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두번째로 탈북자 집단을 맞이해 긴급 대책팀을 가동하는 등 몹시 부산한 표정들이었다. 대사관측은 그러나 탈북자들의 안전을 우려, 탈북자가 투숙할 장소는 물론 필리핀 도착 자체에 대해서도 “모른다”로 일관했다. 관계자는 “전혀 아는 바 없다는 것이 대사관의 공식 입장이며, 그 이외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마닐라의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은 15일 오후부터 각국 보도진들이 진을 치고 탈북자들의 입국에 대비했다.
/마닐라=李光會기자 santafe@chosun.com
/北京=呂始東특파원 sdye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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