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지뢰 도발로 다리를 잃은 21세·23세 두 하사를 위해 국방부는 '최고의 예우' 다짐.
그러나 참사 두 달여 동안 이 약속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국방부의 존재 이유 묻고 싶다

박두식 부국장 겸 사회부장[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박두식 부국장 겸 사회부장[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에이미 멀린스는 39세의 미국 여성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종아리뼈가 없었다. 의사는 그가 평생 걷지도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지금 12쌍 이상의 다리를 갖고 있다. 용도에 따라 기능과 디자인이 각각 다른 의족(義足)들이다. 그는 20세 때인 1996년 미국 애틀랜타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했다. 100m와 200m 달리기, 멀리뛰기 세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배우이자 패션모델로 활동하면서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런 멀린스가 얼마 전 한국을 찾았다. 한 인터넷 언론이 주최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 자리에서 조윤선 전(前)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났다. 조 전 수석은 멀린스에게 지난 8월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도발로 다리를 잃은 한국의 젊은 군인들 이야기를 했다. 멀린스는 흔쾌히 그들을 만나겠다고 했다.

멀린스가 김정원(23세)·하재헌(21세) 하사를 찾아간 그날은 두 하사에게 평생 잊지 못할 하루였다. 두 하사는 그날 새 다리를 얻었다. 김 하사는 오른발 의족을 이용해 처음으로 두 발로 섰다. 두 다리를 잃은 하 하사는 우선 왼쪽 의족만 달았다. 멀린스나 조 전 수석 모두 이 사실을 모르고 갔다고 한다. 두 사람만 그랬던 게 아니다. 한민구 국방장관과 국방부 간부들, 육군 장성(將星) 316명 전체가 몰랐다. 멀린스와 두 하사의 만남, 그리고 이 자리에서 김 하사가 새로 얻은 두 다리로 다시 일어서는 감동의 장면(조선일보 10월 20일자 A1면)은 국방부와 군의 무관심이 빚어낸 깜짝 행사였던 셈이다.

멀린스는 두 하사의 의족을 살펴보다가 바지를 걷어 자신의 의족을 보여줬다. 그는 "나는 태어나서 발가락이 있었던 시간이 1년밖에 안 되지만 지금도 의족을 신으면 발가락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고 두 하사를 격려했다. 두 하사도 멀린스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더 커졌다고 한다. 멀린스는 두 하사에게 자신의 의족 제작팀을 연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하사의 '멘토'가 되어달라는 청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하사와 멀린스의 만남을 주선한 조 전 수석이 두 하사 일에 발벗고 나선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연에 가깝다. 조 전 수석은 북의 지뢰 도발 한 달 후쯤 모교(母校)인 서울 서초구 세화고에 걸린 김 하사를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보고 김 하사가 자신의 고교 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득 그 무렵 전역한 이종명 대령의 사연이 떠올랐다고 한다. 이 대령은 지난 2000년 6월 DMZ 수색 작전 도중 지뢰를 밟은 전우를 구하려다 두 다리를 잃었다. 그는 2년 반이 넘는 재활을 거쳐 군인으로 복귀해 12년을 더 복무했다. 이 대령은 조선일보 인터뷰(9월 25일자 A23면)에서 "처음에는 군 안팎의 응원과 위로가 대단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이 확 줄었다"며 "그 뒤의 재활 과정은 나와의 고독한 싸움이었다"고 했다. 조 전 수석은 두 하사가 이 대령이 겪었던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조 전 수석은 "두 하사가 멀린스처럼 우리 사회의 롤 모델(모범)로 다시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고 했다.

지난여름 북의 지뢰 도발 이후 이어진 남북 대치 상황에서 북의 사과(謝過)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두 하사의 공(功)이 컸다. 병실에 군복을 걸어 놓고 '군인의 길을 계속 가겠다'고 다짐하는 두 하사의 늠름한 모습을 보면서 전 국민이 하나가 됐다. 무엇보다 두 하사와 동년배인 20대들이 뭉쳤다. 이 때문인지 국방부와 군은 기회 있을 때마다 "두 하사를 위해 군에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국방부는 민간 병원 진료비는 한 달만 지원한다는 군 규정 때문에 하 하사가 자비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에야 부랴부랴 이 규정을 바꿨다. 두 하사가 의족을 착용하고 재활에 들어갔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수백명 넘는 군 간부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하사의 다리를 앗아간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도 채 안 됐는데 다른 기관도 아닌 국방부와 군이 벌써 이 젊은 영웅들을 잊은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닷새 전 하 하사는 SNS에 '저 이제 걷습니다'는 글과 사진을 올렸다. 김 하사에 이어 그도 이제 두 발로 서게 된 것이다. 며칠 전엔 김 하사가 탁구를 하는 사진도 올라왔다 . 이런 소식들은 두 하사의 SNS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다. 군이 이들과 외부의 접촉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고충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두 하사의 성공적 자립(自立)은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형 전투기 사업이나 각종 방산(防産) 비리 못지않게 국방부와 군의 신뢰가 걸린 사안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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