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유효 지배 범위는 휴전선 남쪽" 日 방위상 발언에 아연실색
한반도 분단은 日 침탈에서 비롯… 직접적 책임 있다는 사료 넘쳐나
동의 없는 日 군대 한반도 진입, 용납될 수 없다는 마지노선 지켜야

박정훈 논설위원[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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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의 책임 소재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우리는 책임 없다"는 것이다. 1995년 무라야마 당시 총리는 국회에서 "일본 국민으로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자민당 등이 반발 움직임을 보이자 다음 날 바로 발언을 전면 번복했다. 그해 10월엔 고노 당시 외상도 "직접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공개 표명했다. 이후에도 일본 정부는 책임을 인정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일본에 사죄받고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할 수많은 역사적 상처를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남북 분단은 가장 뼈저리고 참담한 상처다. 2차대전 후 독일 분단은 패전국에 전쟁 책임을 물린 것이었다. 똑같은 전범(戰犯) 국가 일본은 그런 패전의 책임을 부과받지 않았다. 대신 피해자인 우리가 분단이란 징벌을 떠안았다. 억울하고 정의롭지 못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1945년 이후 해방 공간에서 남북이 분단된 것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종전(終戰) 일주일 전에 참전해놓고 전리품을 요구한 소련의 치사함이었다. 미국은 그런 소련과 타협했고, 미·소의 냉전적 분할 점령이 38도 선을 경계로 한 분단 상황을 낳았다. 우리 잘못도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 정국에서 우리는 좌우로 갈라져 통일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역사관, 어떤 해석에 따르더라도 일본의 책임이 면제되는 법은 없다. 한반도 분단은 결국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强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분단이냐 아니냐의 기로에 설 일 자체가 없었다. 일제의 식민 통치는 유례없이 엄혹했다. 35년 일제 지배를 겪으며 우리는 통일된 민족국가를 만들 역량이 쇠약해졌다.

일본에 분단의 직접적 책임이 있다는 사료(史料)는 넘쳐날 만큼 발굴돼 있다. 이 문제를 연구해온 최영호 하와이대 명예교수는 미국·소련보다 일본에 더 주된 책임이 있다고 단언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패전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일제는 일왕(日王)을 보호하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려는 망상을 품었다. 일본은 소련을 중재자 삼아 미국과 강화하려 했다. 그 바람에 항복이 늦어져 소련의 기만적인 '일주일 참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패색이 짙었던 1945년 5월 일본의 '최고 전쟁지도 회의'는 '소련을 움직여 일본에 유리한 중개자가 되도록 유도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전쟁 승리란 목표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일본 군부 내에선 전쟁에 져도 일왕이 계속 군림하도록 한다는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가 최우선 목표가 돼 있었다. 더 기막힌 일은 결정문에 '조선을 계속 지배한다'는 계획이 명기된 점이었다. 스탈린의 도움을 받아 '천황'을 지키고 한반도를 '공영권(共榮圈)' 안에 붙잡아 두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소련으로선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독일과 싸우던 전력을 극동으로 이동시킬 때까지 일본의 항복을 최대한 늦춰야 했다. 스탈린은 일본의 중재자 제안을 수락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틀 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불과 1주일간의 전쟁으로 소련은 북한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요컨대 소련 참전도, 남북 분단도 일제의 허황한 망상 때문에 벌어진 '역사의 실수'였다. 일본은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소련에 기대 유리한 항복 조건을 얻어내려 시간을 끌었다. '천황제'와 '공영권'을 지키겠다는 욕심 때문에 스탈린의 책략에 놀아났다. 결국 일본은 '천황제'를 지키는 데 성공했지만 우리는 분단의 비극을 맞았다.

일본은 분단의 원인 제공자였던 것만이 아니다. 전후(戰後) 일본은 남북 분단 상황을 즐기며 거기에 편승해 국가 이익을 극대화한 수혜자이기도 했다. 6·25가 터지자 일본은 "신(神)이 도와준다"며 환호했다. 폐허가 된 일본은 6·25 특수(特需) 덕에 부활했고 재(再)무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국의 안보 우산도 얻어 쓸 수 있었다. 제국주의 가해자가 도리어 성찬(盛饌)을 누리는 역설적 상황이었다. 역사는 결코 공정하지 않았다.

"한국의 유효 지배 범위는 휴전선 남쪽"이란 나카타니 일본 방위상의 발언이 우리의 가슴을 찔렀다. 국제법 논리나 우방에 대한 예의를 떠나 그 바닥에 깔린 역사관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로 우리는 아직껏 분단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양심 있는 정상적 국가라면 안타까워하며 먼저 분

단 해소를 돕겠다고 나서야 옳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마치 남의 일인 양 모르는 척하며 염장 지르는 소리를 해대고 있다.

19세기 말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은 군대 파견으로 시작됐다. 자위대의 동선(動線)에 우리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남이건 북이건 우리 동의 없는 일본 군대의 한반도 진입은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노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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