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영웅 佛 몽클라르 장군 추모하는 김성수 변호사… "한국은 영웅을 너무 쉽게 잊어"

- 우연히 본 전적비가 나를 깨워
당시 마을 사람도 몰라… 戰史 읽고 눈이 번쩍 뜨여
모임 만들고 전기 출간 "장군이 없으면 한국도 없어"

지난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3층 '6·25전쟁실' 앞 복도. 관람객 10여명 앞에서 노(老)신사가 흑백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힘주어 말했다. "이분이 6·25전쟁 때 프랑스에서 건너온 '푸른 눈의 이순신'입니다." 복도에 전시된 프랑스군 몽클라르 장군의 사진 30여점을 둘러보던 스웨덴 국적의 실버베르 야커(69)씨는 "6·25전쟁에 대해 들어봤지만 몽클라르 장군 이야기는 처음 알게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사진전을 기획하고 설명을 맡은 이는 김성수(71) 변호사다.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지평사모') 대표를 맡고 있는 김 변호사는 회원들과 함께 이날부터 랄프 몽클라르(1892~1964) 장군 추모 사진전을 갖고 있다. 12월 15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 이름은 '몽클라르 장군이여, 우리 여기 있습니다(Monclar, nous voici)'. 60여년 전 북한군에 맞서 한국을 위해 싸운 그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지난 6월 프랑스 파리 개선문에서 열린 ‘해외 참전 용사 추모식’에서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느(왼쪽에서 셋째)씨와 김성수(왼쪽에서 둘째) 지평사모 대표가 만났다. 이곳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몽클라르 장군과 그의 병력을 기리는 동판이 있다. 사진 맨 오른쪽은 파비엔느씨의 남편인 프랑스군 예비역 대령 듀포씨다. /지평사모 제공[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지난 6월 프랑스 파리 개선문에서 열린 ‘해외 참전 용사 추모식’에서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느(왼쪽에서 셋째)씨와 김성수(왼쪽에서 둘째) 지평사모 대표가 만났다. 이곳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몽클라르 장군과 그의 병력을 기리는 동판이 있다. 사진 맨 오른쪽은 파비엔느씨의 남편인 프랑스군 예비역 대령 듀포씨다. /지평사모 제공[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몽클라르 장군은 6·25전쟁 때 프랑스를 돌며 직접 모은 병력 600명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미군 23연대(약 5000명)에 배속된 그와 프랑스군 병력은 1951년 2월 13일부터 사흘간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중공군 3만여 명에게 맞서 백병전 끝에 승리했다.

김 대표와 몽클라르 장군의 인연은 2004년 시작됐다. 변호사로 바쁘게 살아오던 그는 20년 넘게 모아온 소송 자료를 보관할 곳을 찾아 당시 양평군 용문면에 작은 사무실 하나를 마련한 참이었다. 사무실이 있는 마을 바로 옆 동네가 지평리였다. "서울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사무실 가는 길에 지평리를 꼭 지나는데, 어느 날인가 전적비(戰蹟碑) 여러 개가 눈에 들어옵디다." 궁금해서 마을 사람에게 물어도 예전에 큰 전투가 있었다는 것 말고는 딱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길로 6·25 전사(戰史)를 뒤졌다. 미국 뉴욕타임스 데이비드 핼버스템이 6·25를 소재로 쓴 책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를 읽다가 '숨은 영웅' 몽클라르 장군 이야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이끈 지평리 전투가, 중공군 참전으로 열세에 몰린 연합군이 전세(戰勢)를 반전시킨 계기가 된 전투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순 넘은 나이에 몽클라르 장군을 발견한 김 대표는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잊힌 몽클라르 복원에 나섰다. 2009년 뜻을 같이하는 지인 10여명을 모아 지평사모를 만들었다. 수소문 끝에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느씨도 찾아 2010년 10월 한국에 초청했다. 비용은 지평사모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탰다. 파비엔느씨가 쓴 몽클라르 장군의 전기(傳記)도 회원들이 자비를 들여 2011년 한국어판으로 출간했다.

김 대표는 해군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했다. 그는 몽클라르 장군의 모습에서 한국 해군의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다고 한다. 김 대표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해 왜군과 싸운 것처럼, 스스로 계급 강등을 요청해가면서까지 생면부지의 나라 한국에 와서 싸운 인물이 몽클라르 장군"이라고 했다.

지난 6월 김 대표를 포함한 지평사모 회원 6명은 몽클라르 장군의 묘지가 있는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를 찾았다. 앵발리드엔 나폴레옹 1세 묘도 있다. 관광차 앵발리드를 몇 차례 찾았었다는 김 대표는 이곳에 몽클라르 장군이 묻혀 있는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는 장군의 묘비 앞에서 '이제야 찾아뵙게 돼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되뇌었다. 그는 "몽클라르 장군 같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분들을 기리는 것은 이 나라 국민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지평리전투 지휘 몽클라르 장군]

장군에서 6·25참전 위해 중령으로 강등 자청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후 한국전선을 찾은 미국 맥아더(맨 오른쪽) 사령관을 만나고 있는 몽클라르(맨 왼쪽) 장군. /지평사모 제공[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후 한국전선을 찾은 미국 맥아더(맨 오른쪽) 사령관을 만나고 있는 몽클라르(맨 왼쪽) 장군. /지평사모 제공[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랄프 몽클라르(1892~1964)는 제1·2차 세계 대전과 6·25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 육군 3성(星) 장군이다. 헝가리 출신 이민자였던 그는 프랑스군에 배속된 외인부대(外人部隊)를 주로 지휘했다. 몽클라르 장군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듬해 초 대대급 병력 600명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애초 프랑스 정부는 군사 고문단 20여명을 파견하려 했지만,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몽클라르 장군이 "자유를 지키는 데 나이가 문제 될 수 없다"며 직접 프랑스 전역을 돌며 병력을 모았다고 한다.

딸 파비엔느를 임신 중이었던 장군의 아내는 참전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는 참전을 강행했다. '대대급 병력은 중령이 이끈다'는 프랑스군 규정 때문에 중령 계급으로 강등을 자처해 한국으로 향했다. 1964년 세상을 떠난 그는 프랑스군에서 무공(武功)을 인정받은 군인만 묻힌다는 파리 앵발리드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됐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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