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둘러싼 과도한 공방… 상식·이성 벗어나 '전쟁'으로
'역사 확립' 십자군적 사명감, 대립 계속돼 온나라 폐허될수도
출판 마무리 시한 못 박지 말고 학계·시민사회 중지 모아야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한반도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적 우월성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확신은 백번 옳다. 현행 검정 교과서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왜곡한 부분도 엄존한다. 하지만 '교과서 대부분이 북한 편'이라는 공격은 지나치게 나간 것이다. 국사학계 전체가 '좌편향'되어 있다는 비난도 극단적이긴 마찬가지다. 과도하게 정치화한 상호 공방(攻防)은 교과서 논쟁을 꼬이게 할 뿐이다. 국정화 시도 자체를 유신 독재 부활과 동일시하는 것도 논리의 비약이다.

극단적 비난은 극한적 공격으로 되돌아온다. 교과서 논쟁이 교과서 전쟁으로 악화 일로인 배경이다. '극좌 교과서를 집필한 빨갱이와 극우 교과서를 획책하는 유신 잔당'의 극한 대립이라는 이미지는 허상(虛像)이다. 언어 인플레를 절제해야 합리적 대화가 가능하다. 역사 교과서 국정·검정제도를 둘러싼 갈등 자체가 피상적이다. 교과서 논쟁이 장기 지속되고 있는 심층적 맥락을 짚어야 한다.

교과서 논쟁이 겉도는 까닭은 한반도 근현대사 해석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날카롭게 충돌하는 데 있다. 민족보다 국가를 중시하는 보수와 국가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진보의 역사관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는 현장이 국사 교과서인 것이다. 역사 서술에서 북한에 호의적이거나 동정적인 진보를 보수가 반국가적 종북 세력이라 비판하고, 권력에 영합해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를 진보가 반민족적 친일 독재 세력이라고 나무라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현행 교과서를 좌편향이라고 보수가 비난하는 데 비해 국가주의의 색채가 강한 미래의 국정교과서가 우편향일 거라며 진보가 미리 힐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의 규범적 확신은 하늘을 찌를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국가는 유한한데 한민족은 무궁하다고 믿는 시민사회와 진보의 도덕적 확신도 대지를 덮을 만큼 장엄하다. 국가라는 당위와 민족이라는 당위가 강 대 강(强 對 强)으로 대치한 모습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교과서 논쟁이 역사 전쟁으로 확대되는 건 시간문제다. 역사 논쟁이 역사 전쟁으로 비화해가는 마지막 지점에는 한쪽이 다른 쪽을 죽여야만 끝나는 잔인한 역사 십자군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뜨거운 교과서 논쟁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 '통일을 대비해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한국 보수의 아이콘다운 단도직입의 정공법으로 해묵은 교과서 갈등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꼬여버린 역사 교육의 실타래를 조금씩 푸느니 아예 끊어버린 것이다. 국정교과서가 국정 현안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이 될 위험까지 감수했다.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보다는 온건 중도층까지 돌아서게 해 반대 세력이 커질 게 분명한데도 박 대통령은 역사 교육 정상화라는 사명감을 앞세웠다.

하지만 십자군적 열정이 변질되면 한 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들 수 있다. 국정교과서 논쟁이 역사 십자군 전쟁으로 치닫는 건 한국 사회의 재앙이다. 상식과 이성을 회복해 교과서 논쟁이 역사 전쟁으로 커지는 걸 막아야 한다. 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반대를 무릅쓴 국정교과서 강행은 박근혜 정부의 남은 임기 전체의 에너지를 탕진케 할 것이다. 박 대통령 말대로 "지금 나라와 경제가 어렵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며 외교·안보를 챙기는 일이 교과서 문제보다 훨씬 긴급하고 위중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국정 우선순위가 엉클어져 민생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게 과연 바람직한지 박 대통령은 자문(自問)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간곡한 당부와는 달리 교과서 국정화는 국론 분열을 극대화하고 있다. 나라 전체가 국정파와 검정파로 쪼개질 판이다. 국가 대계에 백해무익한 일이다. 지금은 교과서 전쟁의 출구를 찾아야 할 때다. 2017년 3월로 정한 국정교과서 출판 시한을 늦추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충실하고 균형 잡힌 교과서를 위한 필요조건은 최소한 두 정부의 1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하는 데 있다. 이 점 이명박 정부의 4대강은 의미심장한 반면교사다. 임기 안에 국토 개조의 대못을 박겠다는 MB의 조급함은 우리의 산하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 100주년을 기리는 정권적 기획이 국정교과서다'는 세간의 의혹을 박 대통령은 불식시켜야 마땅하다. 교과서 개편 작업을 시작하되 마무리 시한을 못 박지 말고 학계와 시민사회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 그 결과 탄생할 '올바른 교과서'는 박근혜 정부의 최대 성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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