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두고온 가족을 평생 그리워하면서 만남의 기회는 거부했다
단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싶은 욕구가 왜 없었을까

최보식 선임기자[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최보식 선임기자[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이산가족 상봉 뉴스가 들릴 때마다 한신(韓迅) 선생이 생각난다.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며 서예가였다. 고향은 함흥이었다. 그는 '흥남 철수작전'때 피란민 대열 속에 있었다. 영하 50도쯤 되는 추운 날이었다.

"그날 옷을 몇 겹씩 껴입고 피란 보따리를 꾸려 마을 초입으로 나왔다. 그런데 함흥에서 흥남 부두까지 피란민들을 태워 갈 군(軍) 트럭이 턱없이 모자랐다. 우리 집에서는 나 혼자만 트럭에 올라타게 했다. 가족은 발을 동동 굴렀고 나중에는 울부짖었다. 트럭 위 군인들은 '지금은 후퇴해도 석 달 뒤면 다시 돌아온다'고 달랬다. 나는 남은 가족을 향해 '석 달만 참고 계시라'고 외쳤다."

아무리 세월이 가도 그 장면은 어제 일처럼 눈에 선했다. '석 달 뒤의 약속'은 65년이 흘러도 지켜지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시(詩)를 썼다. '생일은 잊어도/ 내가 어떻게 그날을 잊으랴/ 내가 북녘땅 그곳에 부모 형제 모두 남겨두고/ 아니 북녘땅 그곳에 부모 형제 모두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남으로 피난 나온/그날 1950년 12월 29일!…'

거제도까지 내려온 그는 죄책감과 회한(悔恨)에 휩싸였다.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 북에 남은 가족을 데려오겠다며 그는 문관(文官)으로 지원했다. 북진하는 국군 부대에 배치돼 강원도 고성까지 올라갔다.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그 뒤 그는 가정을 이뤘고 생활 방편으로 서예를 가르쳤다. 독자(讀者)가 사보지 않을 시집도 아홉 권쯤 냈다. '추억(追憶)'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우연히 읽고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집을 찾아가 그를 만난 게 4년 전 꼭 이맘때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했지만 단아함이 남아 있었다. 말에도 절제가 있었다. 하지만 글로 쓰인 그의 시는 절규(絶叫)에 가까웠다.

'증남아 대답해봐라 왜 대답이 없느냐/ 나는 너의 오빠고 너는 내 동생이다/ 네가 살아있다면 바로 대답해봐라/ 너는 북쪽에 있고 나는 남쪽에 있다/ 내가 지금 너한테 달려가고 싶어도/ 달려갈 수가 있느냐/ 네가 지금 오빠한테 달려오고 싶어도/ 달려올 수가 있느냐'

그는 농사짓는 집안에서 9남매의 둘째, 아들로서는 맏이로 출생했다. 증남이는 바로 아래 여동생이었다. 살아 있어도 아흔 살이 되고 아마 죽었을 것이다. 캐나다로 이민 간 외가 쪽 친척이 북한을 몇 번 방문해 대신 수소문해봤던 모양이다.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고 동생들은 어디 어디에 살고 있다고 전해들었다.

1985년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19차례 상봉 행사가 열렸다. 그는 눈물바다의 상봉 장면을 TV로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지 않았다. 북에 두고온 가족을 평생 그리워하면서 정작 만남의 기회는 거부했다. 단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싶은 욕구가 그에게는 왜 없었을까. 세월에 의해 변해버린 모습에서 옛날의 기억을 왜 확인하고 싶지 않았을까. 복권(福券)처럼 상봉 추첨에 뽑히기를 마음 졸이는 저 수많은 이산가족들을 보지 못한 건가. 그는 이렇게 시를 써내려 갔다.

'금강산에선 지금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 서로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기껏해야 하루 이틀뿐/ 그다음은 또 기약없는 이별을 해야 합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그 슬픔 그 고통을 겪으며/ 나는 다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다시는 그런 이별 할 수가 없습니다'

한때 남북 이산가족은 60만명쯤으로 추산됐다. 하지만 적십자회담에서 시혜(施惠)를 베풀듯 주어지는 숫자는 100명, 그나마 단 2박3일의 상봉이다. 그 한 번이 끝나면 재상봉의 기회는 없다. 생(生)을 마감할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한 번 만나는 것과 같다. 이도 감사해야 한다. 한 번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이산가족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다.

이런 100명의 상봉 이벤트는 매번 판박이처럼 되풀이된다. 상봉 협상이 타결될 때마다 '인도주의' 운운하며 대단한 성과인 양 생색 내는 것도 바뀌지 않았다. 과연 염치 있는 짓인가. 그렇게 해서 공식 상봉한 숫자는 지금껏 2000명도 안 됐다. 적십자사에 등록된 상봉 신청자들 중 절반이 세상을 떠났다. 이들이 다 죽을 때까지 남과 북은 밀고 당기고 할 것인가.

자신의 혈육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고, 편지나 전화도 할 수 없는 '생이별' 상황이 65년째 벌어지는 곳은 지구 상에서 여기밖에 없다. 남북이 내세우는 어떤 위대한 명분과 이념, 원칙도 이런 현실 앞에 서면 한낱 위선(僞善)에 불과한 것이다. 지난 4월 한신 선생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남은 이산가족들에게도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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