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아이스크림 고지' 영상作 발표한 아르나우트 믹]

분쟁지역 다루는 네덜란드 작가
익숙한 평화 속 도사린 전쟁이 진짜·가짜 혼재된 인생과 닮아
북한은 고립된 채 화석처럼 굳어

DMZ(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는 철원 평야엔 '삽슬봉'이란 나지막한(해발 219m) 산이 있다. 소나무를 꽂아 놓은 모양 같아 삽송봉(揷松峰)으로 불리던 게 입을 타고 흐르며 삽슬봉이 됐다. 별칭은 '아이스크림 고지'. 6·25전쟁 때 남북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는데 포격이 하도 심해 정상의 흙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다 해서 미군이 붙인 이름이다.

"이렇게 모순적인 이름이 또 있을까요. 전쟁의 비극 가운데서 아이스크림이란 달콤하고도 귀여운 단어가 나오다니요. 3년 전 DMZ 안보 관광 코스를 따라 올랐다가 사연을 들었어요. 산을 둘러싼 비현실적 평화가 언젠가 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 같더군요. 기막힌 은유죠."
 
‘아이스크림 고지’를 배경으로 한 영상 작품 앞에 선 아르나우트 믹. 엠티 갔다가 전쟁의 현실을 접하는 젊은이들 이야기가 두 화면에 흘러나온다. /박상훈 기자[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아이스크림 고지’를 배경으로 한 영상 작품 앞에 선 아르나우트 믹. 엠티 갔다가 전쟁의 현실을 접하는 젊은이들 이야기가 두 화면에 흘러나온다. /박상훈 기자[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한국인도 잘 모르는 아이스크림 고지 얘기를 꺼낸 이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온 영상작가 아르나우트 믹(53)이다. 코소보, 멕시코 접경 등 분쟁 지역을 배경으로 영상 작품을 찍어 온 작가다. 200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네덜란드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고,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질 정도로 이름난 작가다.

그가 '아이스크림 고지'를 배경으로 영상을 찍어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29일부터 개인전 '평행성(Parallelities)'을 연다. "한국 오기 며칠 전 DMZ 지뢰 사건을 네덜란드에서 봤어요. 친구들이 '저렇게 위험한데 꼭 가야겠느냐'고 말리기에 안심시켰죠. 그곳엔 늘 긴장이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아무 일 없는 듯 평화롭다고요. 이게 이번 주제이기도 하고요." 작품 앞에 선 작가가 웃었다.

이번 작품은 아이스크림 고지에 엠티 간 젊은이들 이야기다. 정상에서 고기 굽고 게임하다가 한 여성이 군복을 입자 무리는 갑자기 군인처럼 행동한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더니 부상당한 군인 시체가 클로즈업된다. 그는 "익숙해진 평화 아래 도사리는 전쟁의 참상, 남북 긴장 상태, 집단주의적 군대 문화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특히 주목한 건 한국의 젊은 세대다. "한국 젊은이들은 글로벌 세대의 일원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군대라는 전근대적 집단에 들어가게 되지요. 스마트폰 게임에서나 보던 상황이 진짜가 되는 거예요. 그 상황이 내 눈엔 아이스크림처럼 보였어요. 달콤하게 포장돼 있지만 결국 녹아버리고 마는 평화 속에 있는 거죠." 그는 군대에서 갓 제대한 남자들을 캐스팅했다. "군대에서 체화된 기억이 어떻게 무의식중에 나오는지 관찰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상엔 진짜 군인과 초소도 등장한다. 보안 때문에 부대 마크와 얼굴은 모자이크로 처리했다. 연출과 실제를 교묘하게 섞어 둘 사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건 그가 자주 쓰는 방식이다. 그는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에 모자이크 처리한 진짜 군인이 등장하니 마치 배우가 진짜고 군인이 배우인 것처럼 헷갈린다"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진짜와 가짜가 혼재돼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촬영 때문에 DMZ를 여러 번 오간 작가는 "베를린 장벽은 거대한 두 사회 시스템이 충돌하는 최전선이었지만 북한은 아예 섬처럼 고립된 채 화석처럼 굳어 있어 대치조차도 무기력해 보인다"며 "과거 독일이 분단됐을 때보다 더 비극적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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