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장부터 병사까지 모두가 담담했다
위기감 속에서도 할 일 묵묵히 할 뿐
20대의 저력 느끼며 분단의 끝을 본다

양상훈 논설주간[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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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 도발 관련 남북 합의가 이뤄지기 10여 시간 전인 24일 오전 10시쯤 중부전선 육군 6사단 7연대 GOP(전초)를 찾았다.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 철책에서 방탄조끼와 방탄모를 받아들었다. 방탄조끼는 무거운 방탄판을 뺀 것으로 파편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10분도 안 돼 옷이 땀에 절기 시작했다. 장병들은 방탄판까지 넣은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권총과 대검, 수통, 통신 장비 등 여러 장비가 달려 있었다. 전체 무게는 15㎏이 넘는다고 했다. 휴대폰 뉴스에선 북한 잠수함 수십 척이 사라지고 기습 침투용 공기부양정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햇살이 눈부셨지만 좋은 날씨를 입에 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측소에 올라서니 비무장지대 안 우리 GP(소초)와 북측 GP, 북측 거점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필자가 서 있는 남방한계선에서 2㎞ 북쪽, 육안상으론 바로 앞이 군사분계선이지만 아무런 표지도 없었다. 드문드문 땅에 박힌 작은 나무 팻말이 전부라고 한다.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우리 GP가 바다 가운데 섬처럼 솟아 있다. 우리 GP들을 연결하는 이른바 추진 철책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다. 전방 사단 수색대는 정기적으로 이 추진 철책을 넘어서 군사분계선까지 수색을 실시한다. 북은 바로 이 추진 철책을 넘나드는 문(門)에 지뢰를 묻었다. 두 명의 청년이 꿈꿨을 인생을 앗아간 그 지뢰였다.

북의 지뢰 도발 이후 많은 사람이 군의 경계 실패를 지적했다. 실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머릿속 생각만으로 무엇을 재단(裁斷)하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절감한다. 250㎞ 가까운 휴전선 전체를 수십 개에 불과한 GP에서 100% 감시하는 것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7연대 정면의 추진 철책은 오른쪽에서 아예 끊어져 있었다. 지형상 철책을 설치하기가 불가능했다. 그 넓은 지역에 남과 북을 가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 GP와 북 GP가 말 그대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곳 우리 GP 바로 밑으로 북은 제2 땅굴을 팠었다.

비무장지대 안은 대부분 숲에 덮여 있었다. 북은 이 숲으로 숨어들어와 우리 GP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지뢰를 묻었다. 추진 철책은 직선인 곳이 드물 정도로 휘어져 있어 시야가 제한된다. 현장에서 보니 지금 당장 또 북이 그런 곳을 골라 지뢰를 묻는다 해도 알 수 있을까 싶었다. 700m가 아니라 200~ 300m 밖도 나무와 수풀 외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군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과학화 경계 시스템을 설치해 운용 중이었다.

넓지 않은 GOP 상황실 벽은 수십 개의 모니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니터는 계속 장면을 바꾸고 확대됐다. 수십 명 장병이 카메라와 센서를 조작하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무엇을 알리는 "삐삐" 소리가 단속적으로 들려 왔다. 어딘가 움직임이 포착되면 그쪽으로 카메라를 집중하고 의심이 가면 수색대가 출동한다. 이 시스템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1년에 절반 이상 낀다는 안개는 제약 요인이고 나뭇잎에 가려진 물체는 볼 수 없다. 사람과 동물의 구별도 힘들다. 관측소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북 확성기가 있었다. 연대장은 "이곳이 북의 타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미리 말해 주었다. 망원경으로 보니 북측 GP에서 몇 명이 움직이고 있고, 우리 쪽 바로 밑엔 비호(飛虎) 자주대공포가 대기 중이었다.

6사단은 갖은 풍파를 겪은 부대다. 6사단 7연대는 6·25 때 평안북도 초산에서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았던 바로 그 부대다. 그래서 초산연대로 불린다. 그 직후 중공군에 대패를 당했으나 용문산에서 큰 승리를 거둬 파로호(오랑캐를 무너뜨린 호수)라는 이름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부대원들 전부가 '결사(決死)'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죽기를 각오했다고 한다. 이 부대의 전방 관측소에도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말로만 적어놓은 게 아니라 그게 부대 역사였다.

모두가 담담했다. 포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사단장부터 병사들까지 차분한 표정으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국군의 기강과 전투력에 대한 걱정이 적지 않지만 위기 순간에 직접 본 장병들은 그런 우려를 무색하게 했다. 50대 이상은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된 이후에 태어난 20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북과 같은 낡고 저열하고 수치스러운 집단에 당한다는 것은 이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남북 간에는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강이 작은 굽이와 소용돌이를 지나 바다 바로 앞까지 왔다고 느낀다. 이제 우리가 '적(敵)과 싸움엔 등신, 우리끼리 싸움엔 귀신'이던 모습에서 벗어나 이번 위기 때처럼 그 반대로만 하면 분단은 머지않아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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