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25명의 베이징(北京) 주재 스페인 대사관 진입은 독일인 의사로 북한인권 운동가인 노르베르트 폴러첸(Norbert Vollertsen·44)씨가 큰 역할을 했다.

◆ 스페인 대사관 앞에 나타난 폴러첸 =폴러첸은 14일 아침 탈북자들을 인솔해 스페인 대사관까지 무사히 진입시킨 뒤 잠시 종적을 감추었다가 이날 오후 2시(한국시각 3시)쯤 다시 현장에 나타나 기자들에게 오전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스페인 대사관 옆 ‘베이징시 유이(友誼) 수퍼마켓’에 들러 약 1시간30분 동안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폴러첸은 “탈북자들은 지상의 지옥에서 탈출한 것”이라며 “이들이 스페인 대사관으로 들어간 것은 독일 등 다른 대사관의 경비가 삼엄해 우연히 결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스페인이 현재 EU 의장국이어서 탈북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폴러첸은 “탈북자 25명중 대부분은 1년반 또는 2년 전에 이미 중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라며, “그동안 중국 동북 지방에 숨어 지내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번과 같은 행동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이동경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폴러첸은 또 “내가 북한에 가서 실상을 다 봤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나섰다”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정권이 없어지는 게 나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들이 중국 당국에 체포되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기자들이 이처럼 많이 모여있고 CNN도 현장을 다 방송했으니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자신했다. 폴러첸은 중국도 올림픽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나를 체포하거나 탄압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방영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폴러첸은 기자들에게 환자복을 입은 북한 어린이들 사진을 공개한 뒤 “오늘 나중에 이곳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으나 더이상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 북한 실상 전세계에 고발 =자선 단체인 ‘독일 응급의사단’의 일원으로 1999년 7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북한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벌였다. 1999년에는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이식하는 열성을 보여 북한당국으로부터 ‘친선 메달’을 받았고, 외국인들에게는 접근이 제한된 지역도 방문할 수 있는 ‘VIP 통행증’까지 받았다. 그 덕분에 북한 여러 지역을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북한 주민들의 열악한 생활상과 당국의 비인권적 행태를 목격하게 됐다.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방북 때 따라온 서방 기자들을 허가되지 않은 지역으로 안내하고 북한 정부를 비방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그해 12월 북한에서 추방됐다.

이후 북한 현실과 북한 정권의 잔혹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는 활동을 활발히 벌여왔다. 지난 1월말 미국의 국제종교자유위원에서 증언한 데 이어, 백악관·의회·국무부·싱크탱크 등 미국 조야(朝野)의 인사들을 두루 접촉했다. 최근엔 월스트리트 저널에 ‘카터 전 대통령에게 띄우는 메모’라는 기고문을 통해 “악(惡)은 존재한다”며 북한 체제를 비난했고, CNN등 언론에도 등장했다.

지난 주말 워싱턴을 떠나 도쿄, 서울을 거쳐 12일 베이징에 도착한 그는 미국에 있는 한 지인에게 “14일 뭔가 큰 게 터질 것”이라며 이번 탈출을 귀띔해준 것으로 전해졌다.
/ 北京=呂始東 특파원
/워싱턴=朱庸中 특파원 midwa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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