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문화부 차장
김윤덕 문화부 차장
미국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영어에서 '미스(Miss)'와 '미세스(Mrs)'를 몰아낸 여걸(女傑)이다. '미스터(Mr)'로만 부르는 남자처럼 여자도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같은 호칭으로 불러야 한다며 '미즈(Ms)'란 단어를 새로 만들었고 널리 퍼뜨렸다. 플레이보이 클럽의 바니걸로 위장 취업해 '저명한 신사들의 밤의 생태에 관한 고백적 체험기'란 폭로 기사를 써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는 1970년대 미국 여성운동의 상징이었다.

4년 전 제주에 온 스타이넘을 만난 적이 있다. "아이를 낳아야 행복하다는 건 국가와 종교가 만들어낸 정치적 이데올로기"라 일갈하면서도 "(이왕 낳았으면) 성적이 아니라 아이가 타고난 영감, 내면에 들어찬 자존감을 키워주라"며 할머니처럼 충고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코끼리들과 한번 살아보는 게 꿈"이라며 입 벌려 웃던 일흔일곱 살 스타이넘은 아름다웠다.

그가 다시 한국에 왔다. 이번에는 평양을 출발해 비무장지대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위민 크로스 DMZ'의 공동 명예의장으로 리마 보위, 메어리드 맥과이어 등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여성 평화운동가들과 함께였다. 출발 전부터 논란을 일으킨 위민 크로스에 대해 스타이넘은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걱정되는 지역에 직접 가서 듣고 이야기 나누는 것 말고 어떤 대안이 있는가. 단절은 더 많은 단절을 낳고, 교류는 더 많은 교류를 낳는다." 지난 24일 남한 땅을 밟고 연 기자회견에서는 "불가능하다던 DMZ 통과를 이뤄냄으로써 우리는 남북이 대화할 수 있는 거대한 가능성을 열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를 지켜본 많은 이의 생각은 달랐다.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대장정'은 남북한 모두에 평화와 화해, 감동의 드라마를 안겨주지 못했다. 분란과 의혹만 낳았다. 사람들은 물었다. 그들의 행진으로 북한 정권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길, 인권의 길로 한 발짝이라도 옮겨갔느냐고. 오히려 북한 주민의 고통만 덮어버린 것 아니냐고.

행진 후 서울시청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회의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경찰을 동원해 보수 인사들의 입장을 막은 주최 측은 회의장에 들어온 탈북 여성 이애란씨를 발견하고 제지했다. 마이크를 겨우 잡은 이씨가 "북한의 핵 개발과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서는 왜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자 야유와 고함이 쏟아졌다. 이씨는 "3만 탈북자의 75%가 자식에게 밥 한 끼 끓여주려고 북한을 탈출한 여성이다. 왜 우리 말엔 귀 기울이지 않는가. 이게 무슨 평화를 위한 행진이냐"고 반문했다.

한반도 평화를 향한 스타이넘의 염원은 순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공허하고 낭만적이었다. 그들은 탈북 여인들의 눈물부터 닦아주었어야 했다. 북에서는 "김일성을 찬양했다"는 보도가, 남에서는 "김정은의 체제 선전에 이용된 바보들"이란 비난을 자초한 이유다. "분노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은 스타이넘이 남긴 명언이다. 그러나 단지 평화를 외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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