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호 워싱턴 특파원
윤정호 워싱턴 특파원
최근 워싱턴DC에서 만난 한국의 한 외교 전문가는 "서울이 19세기 말 한양 같다"며 얼굴을 붉혔다. 차관보에 불과한 중국의 류젠차오(劉建超) 외교부 부장조리라는 사람이 대한민국의 심장인 광화문 외교부 청사에서 고(高)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 문제를 놓고 "우리 관심과 우려를 중요시해달라"고 '협박'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1880년대 청나라 황제보다 외교가에서는 더 실세였다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앞세워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간섭했던 때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 다음 날 한국 집권당이 사드 배치를 공론화하려다 "정부 몫"이라며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는 "중국 관리의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는 100여 년 전 조선의 모습이 아른거린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몇몇 전문가는 중국이 사드가 북한을 겨냥한 것이고, 중국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도발한다고 보고 있다. 한·미 동맹의 균열을 유도하고, 한국이 중국과 맺은 유대를 어느 정도까지 중시하는지 파악하는 시험대로 삼고 있다는 해석이다. 한국이 경제적 이해관계로 중국의 뜻을 크게 거스르지 못할 것이란 자신감도 깔렸다. 북한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중국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까칠함이 있지만 한국은 누르면 누르는 대로 '돈'이 나오는 부잣집 자식 같은 '봉'이라는 인식도 한몫했다.

한국 국방부가 "우리 국방 안보 정책에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선 안 된다"고 공식 항의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하루가 늦었다. 더 이상한 건 이런 국방부를 향해 야당이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한 점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한·중 양국 관계에 큰 여파가 미칠 만한 발언"이라고 했다. 안보 주권을 훼손한 중국 측 발언보다 한·중 관계를 우려하는 야당 모습에 대해 이 외교 전문가는 "미국이 똑같은 이야기를 광화문 한복판에서 했어도 그런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고 했다. 주권을 지키자는 반미(反美) 시위로 난리가 나지 않았겠느냐는 뜻이었다. 중국의 의도대로 한·미 결속에 금이 갔고, 우리 내부까지 흔들어놓은 셈이다.

물론 발단은 한국 외교의 눈치 보기와 경직성 탓이다. 사드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어야지 "절대 들여놓을 일이 없다"고 했다가 일을 그르쳤다. 미국과 일본 등 12개국이 곧 타결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도 외면했다가 일본에 선점 효과를 다 뺏기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들어가겠다"고 하자 미국은 "나중에"만 되풀이한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도 마찬가지다. 국익(國益)을 따져 영국이나 호주 같은 의미 있는 국가가 가입하기 전에 중국이 정말 애가 달 때 운을 떼야 했다. 미·중 양쪽을 향해 사드와 AIIB를 '교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면 지금 같은 낭패는 없었을 것이다. 알만한 사람은 우리가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아차 하는 순간에 등가성(等價性)을 잃어버렸다. 중국은 이제 한국이 AIIB에 들어오든 말든 크게 괘념치 않는다. 사드와 맞바꾸자는 주장은 공허해졌다. 타이밍 놓친 외교로 실리(實利)는 이미 다 달아났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