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의 희·비극성 (Ⅱ)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국제정치문제연구소 이사장
이 모든 한국에게 불안정한 외교적 구도는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 한 가닥은 한국이 한미동맹의 반경을 얼마간이라도 벗어나려는 의도를 부지불식간에 갖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한국과 미국, 한국과 중국과의 전략적 거리를 7:3 정도로 가정해 보는 것이다. 미국 쪽에 7, 중국 쪽에 3으로 경사되어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런 한국의 대미 전략적 경사는 중국도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항이고,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한국은 중국 카드를 써먹어볼 요량을 하기 시작했다. 명분은 그럴 듯했다.

북한의 핵의지를 꺾기 위해서는 중국의 영향력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한국의 전략적 계산의 일단이었다. 북한을 제어하기 위해서 중국을 이용해 볼 수도 있다는 의도가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한국이 중국 카드를 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났다. 곧 중국이 역으로 한국 카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한국 카드는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의 중국 카드는 북한에 대해서 별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해왔다. 중국의 호의를 얻기 위해 중국쪽으로 한발 다가선 효과밖에 얻은 것이 없다.

혹은 이것은 얻은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실제로 중국이 한국 카드를 쓰기 시작하면서 중국이 북한을 버리고 한국을 택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한국은 중국이 퍼뜨리기 시작한 이런 소문에 혹하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런 소문에 근거해서 일련의 외교정책을 짜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은 중국의 이 홍보적 사술에 쉽게 말려들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는 100% 중국이 그것으로 어떤 이득과 어떤 손해를 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한국을 의식해서 북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마치 중국이 한국을 의식해서 북한을 냉대한다거나 북한과의 교류를 등한시한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 있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고 중국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인데도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 그런 환상을 갖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외교의 또 다른 희극과 비극적 단면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수상 아베가 한국외교를 가리켜 “바보”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 THAAD)의 한국 배치는 중국의 기왕의 대 한국 호감을 해칠 것이라는 명분이 그럴듯해 보이는 배경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한국 쪽의 이런 어리석은 착각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약간씩의 외교적 균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외교적 균열은 당사자인 한국이 인정하기 어려울만큼 작은 틈새지만 어떻든 작든 크든 간에 중국은 한국 카드를 성공적으로 써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외교적 요구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지고 있다. 사드가 그 좋은 예이다. 한국이 얼마나 외교적 허점을 보였길래 중국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요구를 하고 나오게 된 것일까? 한국의 대중 경사가 그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조야에서는 한국의 대중 경사를 이미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한국의 외교 관변에서만 부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한국 외교의 또 다른 희극적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한국 카드는 미국과 한국 사이를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는데 그리고 한국과 중국 사이를 보다 가깝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카드를 통해 미국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견인력을 높이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면에서 중국은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 전략적 운신에 불안감을 느끼는 바로 그만큼 중국의 한국 카드는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친미국, 결일본, 연중국 정도의 양국과의 관계를 맺어왔지만 이런 전략적 유용성의 가치 기준은 언젠가 그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빌미를 현재의 우리 외교는 제공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외교를 불안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원천이 되고 있다. 한말 중국 외교관 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라는 외교적 충고를 남긴 바 있지만 이제 바야흐로 바로 그 친밀도의 순서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개연성 앞에 우리 외교는 서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친미국이고, 중국은 아직 연중국의 단계이지만 그 순서가 뒤집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사실이야말로 과거와 같이 또 다른 우리 역사의 비극적 단초를 제공하는 시초가 될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중일 사이의 힘의 축의 변화는 애초에 그 모든 것을 시작한 당사국이 미국이나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외교 당국이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한 번 외교적 수를 써본다고 써봐 온 것이 오늘날의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희극적 전조로 시작한 우리 외교 정책이 이제는 비극적 단초의 단계로 진입할지도 모른다는 지경에까지 와있다. 그리고 오늘의 사태란 바로 사드의 한국 배치가 당장 코앞에 닥친 북한의 대남 공격 수단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절대 필요한 것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것을 당장 실천에 옮길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외교적 곤경에 처해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은 당장의 배치를 원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도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상황이 우리가 의도치 않게 많이 변해버렸다. 중국의 눈치를 본답시고 그리고 소위 말하는 미·중 양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한답시고 우리 외교 당국이 중국과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7:3에서 6쪽으로 그 경사도가 중국쪽으로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애초부터 한국이 외교적 융통성이나 또는 전략적 신축성을 얻기 위해 또는 견인력을 미·중 사이에서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면 우리가 임의로 상정한 7:3의 미·중과의 거리는 7.5:2.5나 8:2의 거리로 짐짓 미국에 대한 편향성을 먼저 보였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런 척만 하다가 그 기점을 출발점으로 해서 다시 중국쪽으로의 편향정책을 썼다면 한국측의 외교적 운신은 훨씬 더 그 굴신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외교가 무엇인가? 바로 그런 운신의 굴신성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던가. 만약 이렇게 했다면, 미국과의 거리는 8에서 7로 옮긴다든지 또는 6까지 중국과의 거리를 좁힌다고 해도 미국은 한국의 대중경사를 탓하지 않았을런지 모른다. 미국은 한국의 운신을 삼장법사 손바닥 위의 손오공쯤으로 너그럽게 보아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도 미국의 의심을 사지 않고 중국과의 관계에서 훨씬 더 외교적 견인력을 보다 신축자재하게 발휘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미국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한국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의심을 사고서는 한국 외교가 중국에 대한 유연성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중국에 친중국이든 화중국이든 연중국이든 무슨 유형의 전략적 연대를 중국과 꾀하든 그것은 미국의 의심을 사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미국이 한국을 의심하지 않는 한 한국은 대중국 외교에 훨씬 더 자유로운 운신책을 확보하게 된다.

한국은 이런 의미에서 미국과의 연대에 조금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미국에 대한 사전포석 없는 대중국 강화책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수반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은 자의적인 전략적 위치 변동을 조금씩은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이해없는 이런 자의적 위치 변동이야말로 한국외교를 딜레마에 빠지게 할 뿐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수십 년을 굳어온 7의 위치에서 6의 위치로 거리를 이동한 상태에서는 다시 7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미 일정 부분 상해버린 미국과의 오해 아닌 오해의 관계도 그 거리에서는 쉽게 회복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마 이러한 미국과의 또는 중국과의 관계는 김대중 정부로부터 시작하여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오늘의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외교적 관성으로 자리잡혀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것에는 좌우가 따로 없고 오히려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자면 이명박, 박근혜의 보수정부가 더 그 책임을 져야할 런지 모른다.

아마 이렇게 얘기해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소원했던 대미 관계를 담보로 친미정책을 손쉽게 구축할 수 있었다. 또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소원했던 대중 관계를 담보로 친중정책을 쉽게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담보성 있는 외교정책으로 생긴 이명박 정부의 대미 친밀도와 박근혜 정부의 대중 친밀도를 마치 MB나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적 경륜의 결과로 치부되곤 하는 것이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라고나 할까. 강대국은 그들이 친하고 싶은 상대와 친하고 싶은 만큼 친하고 필요한 만큼 친할 뿐이다. 한국이 친해지고 싶다고 친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 미국 같으면 혹시 한국을 그렇게 봐줄 수도 있을지 모르나 중국에게는 어림없는 소리다. 중국의 외교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현실주의”이다. 쉽게 말해 타산적이라는 말이다. 중국인의 기질에 대해서 가장 통찰력 있는 관찰력을 자랑하던 임어당(林語堂)은 미국인, 영국인, 일본인, 소련인 등의 현실주의를 많아야 2내지 3정도로 등급을 주었다면, 중국인에 대해서는 5의 등급을 준 적이 있다. 중국인은 넌센스가 없는 사람들이다. 철저한 계산과 실리주의에 의해서 행동한다. 구멍봐 가면서 말뚝깍는 사람들이 중국인들이다. 중국이 한국에게 외교적 우호성을 보이는 것은 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국에게 미소를 짓는 시진핑이나 중국의 고위 관료들에게 한국은 마치 자기들의 외교력이 뛰어나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줄타기 외교를 한답시고 해보다가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꼴이 되고나 말았다고 할 수 있을까. 30여년 전 미국무성동아태차관보를 지낸바 있던 개스톤 시구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국내 문제에 외세를 끌어들이는데 이골이 난(adept) 나라라고.” 조선조가 망할 때 조정에서는 하루는 친청배일(親淸排日)하고 다음날은 친일배청(親日排淸)하고 그리고 그 다음날은 친아반청(親俄反淸)는 식의 외교적 술수를 구사했었다. 외교정책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남의 눈치를 보는 행위이다. 눈치를 본다는 것과 남을 의지한다든지 배려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자기의 정해진 정책에 따라 외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치를 보면서 외교를 하기 시작할 때 다른 나라들은 우리를 얕보기 시작한다. 한번 얕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거기에 또 맞추어서 대응해야 한다. 이런 외교행위가 반복될 때 우리의 자주성은 점점 좀먹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지금 한국외교의 상황이 이와 유사한 패턴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말이 좋아 전략적 모호성이지 명료해야할 때 모호한 것은 약점의 노출이 될 뿐이다.

이런 어리숙한 한국의 외교 전략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사드 문제다. 사드의 타격 고도나 거리 또는 밴드 레이더에 의한 정보 수집 능력이 중국의 미국을 공격하기 위한 대륙간 탄도의 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중국이 잘 알고 있다. 종착 단계(terminal phase)에서의 타격 기술의 정밀성을 나날이 발전시키고 있는 북한의 위협을 중국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중국은 사드의 한국 배치를 반대하고 있다. 중국이 끝까지 원하는 것은 미국의 위협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줄여야 한다는 명분뿐이다.

실제로 사드는 중국이 미국을 향해 겨냥하는 대륙간 탄도탄의 탄도 거리나 고도나 궤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중국은 미국이 중국을 위협한다고 과장하고 있다. 중국은 이런 미국의 대중 위협론이 허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한국의 안보를 담보로 하여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애초부터 이 문제에 관한한 중국에게 만만한 싹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할 때부터 중국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문제를 지지부진하게 처리해왔다. 설사 사드가 한국 안보에 결정적으로 필요하지 않다하더라도 만약의 경우의 북한 위협 또는 만약의 경우의 중국 봉쇄의 필요성이 우리 안보에, 그리고 통일 작업에 더 필요할 수도 있다는 그 군사외교적 맥락을 놓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드 배치에 따른 경비부담을 떠맡게 되더라도 그것이 한미동맹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강화된 동맹을 기반으로 한국의 대중국 입지는 훨씬 더 탄력성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국은 미국의 의심없이 대중국 외교에 훨씬 더 유연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과의 그런 전략적 제휴의 강화가 우리 외교와 유연성을 발휘하는데 큰 자산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대통령의 전략적 판단이 미흡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전략적 비전을 확고하게 마음속으로 다지고 이를 현실에 옮기고자 했다면 사드 문제는 곧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중국의 반대는 한국이 애초부터 자초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한국이 배치를 결정하고 나갔다면 중국은 큰 반대없이 이를 현실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본다. 사드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TPP의 경우에도 한국 외교의 자충수로 볼 수 있다. 중국을 의식한답시고 가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는 창립 멤버가 되는 기회를 놓칠 수 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미국이 한국의 되지도 않는 전략적 계산에 화가 났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지도 모른다.

외교 정책의 상한과 하한, 매크로와 마이크로 그리고 장기와 단기적인 측면의 통합적인 통찰력과 경륜을 결여한 외교 정책이 얼마나 한 국가의 안위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힐 수 있는가를 저간의 한국 외교가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망한 우리 역사의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현재 위치를 조감할 수 있는 외교적 사색가가 있었다면 우리 외교가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우리 외교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본다. 외교가 비극적 단초가 되어 다시 국운이 기울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외교의 비극적 단초란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단계로부터 시작된다. 비유컨대 마치 태산준령의 어느 산봉우리에 떨어진 한 방울의 빗방울이 어느 것은 1mm의 차이로 동해바다로 흘러가고 또 어느 것은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외교적 단초가 되는 일은 그래서 심상하게 볼 일은 아니다.

키신저가 그랬던가. 외교에는 실천보다 생각하기(thinking)가 우선이라고. 요컨대 개념적 정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과 일본은 지금 무서울 만큼 치밀하고 장대한 세계 전략을 준비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것이 일본의 우경화든 중국의 패권화를 의미하든 그리고 그 무엇을 의미하든 그들은 그들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일을 착착 진행해가고 있다. 우리만 주위 정세에 휘둘리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제대로 머리만 쓴다면 그들에게 떨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리 외교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잘 짜여진 치밀한 전략적 구상이 아닐까!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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