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復 70년이 장난거리인가
문명 세계가 破門하고 있는 '인터뷰' 주인공 김정은에게 왜 레드카펫을 깔려 하는가
아무리 북방정책 절실해도 '기본'을 흐려서는 안 된다

류근일 언론인
류근일 언론인
2015년 벽두부터 국제정치의 기상도가 급속히 바뀌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문명권과 반(反)자유민주주의 집단들 사이의 격상(格上)된 긴장이 그것이다. 이 추세는 한반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당장 북한의 반(反)자유 집단은 핵(核)탄두 소형화와 대륙 간 탄도탄 개발로 미주(美洲)까지 위협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18세 소년은 IS(이슬람국가)에 가담하겠다며 터키 국경을 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는 몇몇 강대국들과 수많은 개별국가 사이의 다툼이 국제 갈등의 주된 메뉴였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북한의 사이버 공격, 프랑스의 풍자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이슬람 과격파의 살육, 그리고 IS의 잇따른 외국인 억류자 처형을 계기로 세계는 다시 "자유민주 문명이냐, 자유민주 파괴냐?" "근대(modernity)문명이냐, 근대문명 파괴냐?" "계몽과 이성(理性)이냐, 몽매(蒙昧)와 광신이냐?"의 대결로 치닫고 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문명에 대한 반(反)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도전은 물론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미국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이미 '포린 어페어스' 1997년 11~12월호에 이렇게 썼다. "페루에서 팔레스타인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슬로바키아까지, 그리고 파키스탄에서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반(反)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충격적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그는 세계 193개 나라 중 118개 나라가 이런저런 '반(反)자유' 치하에 있다고 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근대 자유민주 문명권'이란 실제로는 갈수록 위험에 노출되는 '취약한 문명'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위험한 상황임에도 자유민주 국가들은 그동안 별다른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은 채 오로지 '경제동물적' 라이프 스타일에만 몰입해왔다.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박애도, 2차 대전 때의 반(反)나치 레지스탕스도, 그 후의 반(反)볼셰비키 투쟁도 다 옛 노래였다. 그래서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그루터기가 이젠 더 이상 없다는 것이었다. 이 안일함에 있어서는 민주화 후 한국 정부들과 국민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민주 문명권의 이런 졸음을 확 깨게 만든 게 바로 영화 '인터뷰' 상영관을 폭파하겠다고 한 북한의 대미(對美) 공격이었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크림반도 합병이었고, 독일 언론인에게 "유럽을 점령해 여자들을 성(性)노예로 삼겠다"고 한 IS 전사(戰士)들의 호언이었고, 파리 도심을 피로 물들인 '외로운 늑대'들의 백주 테러였다.

이런 의외의 허(虛)를 찔리고 나서야 비로소 EU 각국은 공수부대까지 동원해 테러 혐의자들을 제압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유튜브 인터뷰에서 "인터넷으로 변화를 일으키면 북한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레짐 체인지)"고 선언했다. 이에 앞서 유엔총회는 김정은을 국제형사법정에 세울 것을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의 문명국들은 원리주의·광신주의·테러리스트 네트워크의 살인, 처형, 학살, 고문, 정치범 수용소, 언론 자유 압살, 여성 학대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고 눈에는 눈으로, '비례적으로' 응징하기로 한 셈이다.

이런 국제정치의 풍운 앞에서 박근혜 정권은 어떤 몸짓을 하고 있는가? 그의 통일부는 광복 70주년을 북한과 공동으로 기념하겠다고 했다. 대한민국 70년사와 '최고 존엄' 70년사를 '공동 기념'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공상과학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그 둘이 '공동 기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70주년 기념 남북 수건 돌리기 놀이'도 못할 게 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거라면 굳이 '역사'를 빙자할 것까진 없다. '광복 70년'은 통일부 관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오락 장난거리가 아니다.

어떤 청와대 인사는 또 "나진·선봉에 투자하려면 유엔의 대북 제재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권은 결국 문명 세계가 '인터뷰' 주인공을 파문(破門)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그에게 레드 카펫을 깔아주겠다고 한 꼴이다. 이런 엇박자, 과연 잘하는 일인가? 우리는 동맹외교와 함께 북방정책도 물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무엇이 기본인가?'를 흐려선 안 된다.

대한민국은 근대 계몽사상과 자유민주 문명권에 접속해서 세운 나라다. 따라서 자유민주 문명과 반(反)자유민주 야만이 한판 붙을 때는 우리가 어느 쪽 보조에 맞춰야 할지는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다. '통일 대박'은 실적에 급급한 나머지 그걸 헷갈려 하는 방식으론 결코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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