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석 국제부 기자
손진석 국제부 기자
지구상에서 현실 자체만으로도 드라마적 요소를 충분히 갖춘 곳은 북한이다. 21세기에도 이어진 3대(代) 세습, 폭압(暴壓) 통치,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주민들까지 각색이 필요없는 스토리들이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경청해왔다. 그들이 입을 열면 피눈물 나는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다. 보편적 인권 차원에서 그들의 증언에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탈북자가 털어놓는 이야기가 완벽한 진실인지에 대해 의문부호가 붙고 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언론은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탈북자 신동혁씨의 증언이 일부 허위였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보도하고 있다.

신씨는 27개국 언어로 번역된 자서전 '14호 수용소 탈출(脫出)'에 두 가지 오류가 있다고 인정했다. 어머니와 형이 처형당하는 걸 목격한 곳이 14호 수용소가 아니라 18호 수용소였다고 번복했다. 자신이 고문당한 나이도 책에 나온 13세가 아닌 20세였다고 말을 뒤집었다.

물론 이 정도를 가지고 신씨의 진정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북한의 실상에 대한 본질이 바뀔 리도 없다. 미 국무부의 설명대로 '가장 끔찍한 수용소냐, 매우 끔찍한 수용소냐 하는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탈북자의 이야기는 한 번 걸러서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신 소지를 남긴 점은 생각보다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종북 콘서트' 논란을 부른 재미 교포 신은미씨 이야기가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북한을 스치듯 피상적으로 경험한 것을 이야기한다는 탈북자들의 비판에 무게가 실리면서 맥을 못 췄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부로 숱한 고초를 겪은 탈북자들의 말에 신뢰를 보냈고, 신은미씨의 짧은 경험은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신동혁씨의 '사소한 거짓말'이 일으킨 파장으로 친북(親北) 세력이 탈북자들을 공격할 빌미가 커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탈북자들의 이야기와 신은미씨 아류의 인사들 말이 비슷한 무게를 갖고 진실 공방을 벌인다면 우리 사회의 무게중심이 흔들릴 우려가 생긴다. 당장 북한의 대남 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서는 "지금까지 (신동혁씨가) 입에 올려댄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며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탈북자가 많아진 까닭에 탈북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탈북자가 늘어난 만큼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검증받을 개연성이 커졌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탈북자의 경험담은 굳이 극화(劇化)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세계인들이 낯선 영화 한 편으로 받아들인다. 있는 그대로를 전달해도 충분한 울림을 줄 수 있다. 사소한 오류 하나만 삐져나와도 고통받은 사람에게도 흠결이 생긴다는 게 신동혁씨를 둘러싼 논란의 교훈이다.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통일을 이룩하려면 진실한 메시지를 던지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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