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과 교수
인천 어린이집에서 촬영된 동영상을 보며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절대 있어서도, 또다시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인천, 대한민국, 지구라는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보육 교사가 아이 뺨을 때릴 것이고, 또 다른 고용주는 이주 노동자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며, 또 다른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많은 북한 주민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밝혀진 행복보다 더 많은 행복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우리 눈에 보이는 불행보다 끝없이 더 많은 불행과 만행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우리는 다 안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 보기 전까지 아는 것은 단지 무의미한 사실일 뿐이다. 왜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진실은 무의미하지만 아무리 허무맹랑한 막장 드라마도 단순히 '눈으로 볼 수 있기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영장류(靈長類)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뇌에는 적어도 25~30개의 영역이 시각 정보 처리를 하고, 뇌 전체 영역의 3분의 1 정도를 보는 데 사용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상은 (적어도)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진화적으로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후각과 촉각은 시공간적 해상도가 낮다. 세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청각은 시간적 변화에는 예민하지만 공간적 인식에서는 뒤떨어진다. 더구나 청각과 소리를 기반으로 한 언어는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다. TV 리모컨으로 정해진 몇 가지 기능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나의 진정한 의도는 표현할 수 없는 것같이 세상을 언어만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언어의 해상도가 현실의 해상도보다 훨씬 더 낮기 때문이다.

결국 본다는 것의 의미는 보기 전의 무의미와 무규칙이 '본다'는 뇌의 과정을 통해 의미와 규칙의 세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보지 못하면 카오스, 볼 수 있으면 코스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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