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통일대박론'으로 천덕꾸러기 벗어난 통일부, 흥분한듯 뒤죽박죽 對北 제안
核·남북 선순환… 창조국방… 무슨 말인지 알고들 하나… 北은 이 상황 즐길 게 분명

박두식 논설위원
박두식 논설위원
통일부는 2008년 보수(保守) 정부 출범 후 줄곧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이명박 정부는 그해 초 통일부를 아예 없애는 정부 조직 개편안을 만들었다. 통일부는 국회 심의 과정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박근혜 정부 초기에도 통일부의 입지는 늘 불안했다. 통일 분야의 고위 인사들이 딱히 비리나 잘못이 드러난 것도 아닌데 줄줄이 낙마(落馬)하는 일이 빈발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을 이끌었던 군(軍) 출신 인사들의 견제가 심했다고 한다.

통일부의 팔자가 바뀐 것은 박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했던 작년 초 신년 회견이었다. 이때부터 통일부는 외교·안보 분야의 중심 부처가 됐다. 며칠 전 외교·안보 부처들의 신년 업무 보고도 통일부가 주관했다. 통일부의 지위가 수직 상승한 셈이다.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통일부가 격하게 '흥분'한 것 같다.

통일부는 광복·분단 70주년인 올해 어마어마한 사업들을 북한과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한반도 종단(縱斷) 철도 시범 연결, 남북겨레문화원의 서울·평양 개설, 북한 인프라 지원 등이 망라돼 있다. 성사되기만 한다면 2015년은 대립과 갈등·충돌로 가득했던 분단 70년사(史)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70년간 남북 간 사업이 우리 뜻대로 된 적은 거의 없었다. 북한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쪽인데도 남북 관계에선 늘 갑(甲) 행세를 해 왔다. 남북 대화 역시 북의 뜻에 따라 대화가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곤 했다. 지금도 우리 정부의 연이은 대화 제의에 북은 '한·미 군사훈련 중단' 같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붙이고 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도 현 단계에서 거창한 남북 사업들을 잔뜩 늘어놓은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곧바로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북의 대화 의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엔 새정치민주연합이 "류 장관은 박 대통령에게 항명하지 말라"는 논평을 내놨다. 야당이 나서서 "북이 호응할 여건을 만들라"는 대통령 지시에 왜 주무 장관이 토를 다느냐고 타박한 것이다. 정부 내 혼선을 부채질하려는 심사가 느껴진다.

이런 혼란의 정점은 '광복 70주년 남북 공동 기념위원회' 구성 제안이다. 남북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문화 공연을 하고 스포츠 교류를 하면서 광복과 함께 찾아온 분단의 아픔을 달래보자는 이 제안에 담긴 근본 취지 자체를 흠잡고 싶지는 않다. 박 대통령도 작년 8·15 경축사 때부터 '남북이 광복을 기념할 수 있는 문화 사업 등 여러 가지 공동 행사'를 몇 차례 언급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남북 공동위원회로까지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북에서 8·15는 김일성 일가(一家)의 신화가 시작되는 날이다. 북은 매년 8·15에 맞춰 "일제를 때려 부수고 나라를 찾아준 민족 재생의 은인"이라며 김일성을 떠받들어 왔다. 미국과 손잡은 세력이 남한에 불법으로 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분단됐다고 주장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런 북한 김정은 정권과 어떤 광복을 어떻게 함께 기념하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민간 차원의 교류를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이라면 몰라도 정부가 직접 나서서 공동위원회까지 만들 일은 아니다.

이 정부 통일 정책의 특징 중 하나가 민간에 맡겨 둘 일과 정부가 나설 일, 서둘러서 해야 할 과제와 뒤로 미뤄도 될 사안 등을 뒤죽박죽 섞어 놓는 것이다. 민간 분야의 원로와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와 통일부의 관계도 그렇다. 지난해 초부터 민간 차원에서 불붙은 통일 논의를 체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작년 여름에 신설한 조직이 통일준비위다. 통일부의 신년 사업 구상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 통일준비위가 맡으면 될 일들이다. 이 기구를 통해 남북 철도, 북한 인프라 개발, DMZ(비무장지대) 활용, 통일 후 화폐 개혁 등 모든 문제가 논의되고 다뤄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국민에게 통일의 실익(實益)과 청사진을 보여주고 언제든 닥칠 통일 시대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 집행을 전제로 이뤄지는 정부의 정책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정부는 지난해 말 대북 대화 제의에 통일준비위를 들러리로 내세워 이 기구를 북의 대남(對南) 기구인 조평통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더니 통일부 업무 보고에선 통일준비위가 다루면 제격일 미래 구상들을 잔뜩 집어넣었다.

한반도 정세와 남북 현실에 맞게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주장에 모든 것을 맞춰 넣으려다 빚어진 사태다. 통일부뿐만 아니라 외교부는 자신들도 무슨 뜻일지 모를 '북핵과 남북 관계의 선순환'을, 국방부는 급조한 '창조 국방'을 들고 나왔다. 이렇게 어설픈 방식으로는 북을 대화의 장(場)으로 끌어낼 수 없다. 북은 거꾸로 우리가 자신들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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