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모 김정일 낳을 때 소련병영에 머물러
김정일 본인 40회 생일 앞두고 출생설 조작


북한 당기관지 노동신문과 정부기관지 민주조선은 1982년 2월 15일자 1면에 김정일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한다는 중앙인민위원회 정령(政令)을 실었다.

"김정일동지는 항일의 피어린 나날 백두산밀영에서 탄생하여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며 성장하였으며, 일찍이 주체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수행할 큰 뜻을 품고 혁명활동을 시작하여 조국과 인민 앞에 불멸의 공적을 쌓아올렸다.…"

김정일의 40회생일(2.16)에 즈음해 발표된 이 정령은 김정일이 영웅칭호를 받게 된 사유와 함께 그가 백두산에서 출생했음을 천명하고 있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이 처음으로 공식 제기된 것이다. 이 정령이 나온 이후 북한은 공식 출판물과 김정일전기류 등을 통해 그의 백두산 출생설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김일성과 그가 이끄는 빨치산 대원들이 1936년 가을부터 백두산일대에 비밀유격근거지인 밀영(密營)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밀영'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또한 1941년 6월에는 이곳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이 유숙할 귀틀집(통나무집)이 지어졌으며, 이듬해 2월 이 귀틀집에서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김일성은 1930년대 만주 일대에서 일제에 항거해 빨치산활동을 벌였고, 3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토벌에 쫓겨 40년 10월 하순 아무르강(江)을 건너 소련으로 피신했다. 김일성이 소련으로 들어갈 때 김정숙도 동행했으며,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소련으로 들어간 김일성 일행은 한동안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남야영 또는 B야영이라 부르는 곳에 머물다 42년 7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북야영, 일명 A야영으로 옮겼다. 이들이 북야영으로 떠나기 5개월 전인 42년 2월 남야영에서 김정숙은 김정일을 낳았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소련으로 들어간 이후 45년 8월 광복 때까지 줄곧 두 야영에 머물렀으며 항일대전에는 끝내 참전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남야영에 있을 때인 41년 4월과 42년 5월 두 차례 정찰임무를 부여받고 소수 대원과 함께 만주로 출격한 적이 있다. 하지만 김정숙은 한 번도 야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김정숙이 41년 6월부터 백두산에 머물렀다든가, 42년 2월 그곳에서 김정일을 낳았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 소련식 이름인 '유라'로 불렸고, 이 이름은 입북이후 그가 60년 7월 남산고급중학교(현재 평양제1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대로 쓰여졌다. 김정일이라는 이름은 그가 공민증을 발급 받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신화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김정일 본인으로 전해진다. 김정일은 72년 5월 간부들과 백두산 산행을 다녀오면서 『백두산은 나의 고향, 나는 백두산의 아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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