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邊境의 호텔 객실엔 공산품이 귀해서인지
얇은 면수건 두 장과 새끼손톱만 한 비누만 놓여 있었다.
짐을 풀고 식당으로 몰려갔는데…

최보식 선임 기자
최보식 선임 기자
새해가 됐으면 거대 담론을 논해야 마땅하나, 준비된 것은 '두 개의 사소한 여행 얘기'밖에 없다.

하나는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원정대'의 마지막 한 달 구간에 합류했을 때의 얘기다. 그 과정에는 고비사막과 중국 단둥(丹東)의 끊어진 압록강 철교에서 바라본 북한 신의주, 광개토대왕비와 고구려 유적, 눈바람 치던 백두산 천지(天池), 동해로 흘러가는 황토색 두만강 등이 있었다.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았을까.

그 답변이 '러시아의 변경(邊境) 크라스키노에 소재한 호텔의 식당'이라면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우선 크라스키노는 도시라기보다는 촌락에 가까웠다. 수도 모스크바에서 보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구석일 것이다. 스탈린 시대에 지었을 공동주택들은 좁고 낡았다. 버려진 빈집도 많았다. 거리를 왕래하는 주민들보다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이 더 자주 눈에 띄었다.

국경을 넘기 전 머물렀던 중국 훈춘(琿春) 때문에 더 대비됐을 것이다. 훈춘에는 개발 바람과 함께 돈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낮에는 지저분해도 밤거리에는 네온사인이 '비까번쩍'했다. 어디서든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런 소란스러운 풍경은 낯설 게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고, 어쩌면 중국이 한발 앞선 우리의 '자본주의'를 베꼈을 테니까.

그런 훈춘을 떠나 크라스키노에 도착한 뒤 원정대가 묵은 호텔도 동네 여관 수준이었다. 공산품이 귀해서 객실 세면장에는 얇은 면수건 두 장과 새끼손톱만 한 비누만 놓여 있었다. 대원들은 짐을 풀고 식당에 몰려들었다. 패딩 점퍼 차림이었다. 몇몇 대원들은 벗어서 의자 뒤에 걸었다. 메뉴판을 들춰보며 여종업원을 불러 주문하려고 했다. 평소처럼 한 것이다. 그런데 여종업원이 이렇게 말했다.

"식탁에 패딩 점퍼 차림으로 앉을 수 없다. 의자에 거는 것도 안 된다. 백팩도 그렇다. 입구에 있는 클로크룸(cloakroom)에 맡기거나 객실에 벗어놓고 와야 한다."

우리와 다른 식탁 매너로 인한 '해프닝'이라고 넘어가도 된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러시아의 이 궁벽한 마을에도 유럽 문명의 품격(品格)이 살아있구나. 물질적으로 넘쳐나진 않지만 이들은 스스로 존엄을 지킨다.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여기서 우리의 밑천이 드러나는구나. 바깥세상에서 우리가 대접받을 만한지를 평가하는 기준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문제는 돈과 경제만으로는 결코 이런 가치를 구매할 수가 없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이 있지만 밥 못 먹어 굶어 죽는 시절은 지났다.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린다는 말까지 한다. 그럼에도 우리 삶의 품격은 올라간 것 같지 않다. 오직 돈의 가치만 있고 다른 가치들은 거의 사라졌다. 한때 사람다움을 증명해줬던 수양·청빈·절제·인품·도량·헌신·존엄·고상함 같은 어휘는 죽은 말처럼 됐다.

두 번째는 보름 전 일본 아키타현의 가쿠노다테(角館)로 겨울 휴가를 갔을 때의 얘기다. 여러 감상이 없지 않지만 역시 눈[雪]이었다. 이미 건물 지붕마다 60㎝ 이상 눈이 쌓여 있었다. 머무는 동안 눈은 찔끔찔끔 흩날리다가, 돌아오기 전날 밤에는 폭설로 바뀌었다.

새벽녘 잠에 깨어 여관에서 빌려주는 장화를 신고서 산책을 나갔다. 아직 어둠은 덜 걷혔다. 그런데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다. 주민들이 집과 가게 앞의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는 게 아닌가. 맨홀 뚜껑을 열어 그 둘레에 얼어붙은 눈까지도 털어냈다. 내게는 낯설었을 뿐, 일본을 자주 왕래하거나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상적 광경이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구청 공무원들이나 해야 할 일이었다. 심지어 자기 집앞의 눈 치우는 법과 제도를 아무리 만든다 해도 우리는 과연 될까. 이게 우리가 일본을 욕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일본을 따라갈 수 없는 대목이다.

우리는 법과 제도만 만들면, 세금을 퍼붓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걸로 여긴다. 큰 사회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랬고 꼭 거기서 끝났다. 그런 뒤 똑같은 사건은 반복된다. 법과 제도만 떠들지 그 속에서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에 대해서는 입이 없다. 공동체를 위해 시민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행동과 직업윤리가 언급된 적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요구하고 투쟁하는 것만 배웠을 뿐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집단과 진영(陣營) 논리에 너무 쉽게 편입되고, 실질보다는 이념과 선동 구호에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자신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개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게 됐다. 성숙한 사회는 결국 성숙한 개인들이 꽃다발처럼 모여서 이뤄지는 데도 말이다. 새해 첫날에 너무 '사소한 얘기'를 한 것 같다.

새해가 됐으면 거대 담론을 논해야 마땅하나, 준비된 것은 '두 개의 사소한 여행 얘기'밖에 없다.

하나는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원정대'의 마지막 한 달 구간에 합류했을 때의 얘기다. 그 과정에는 고비사막과 중국 단둥(丹東)의 끊어진 압록강 철교에서 바라본 북한 신의주, 광개토대왕비와 고구려 유적, 눈바람 치던 백두산 천지(天池), 동해로 흘러가는 황토색 두만강 등이 있었다.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았을까.

그 답변이 '러시아의 변경(邊境) 크라스키노에 소재한 호텔의 식당'이라면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우선 크라스키노는 도시라기보다는 촌락에 가까웠다. 수도 모스크바에서 보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구석일 것이다. 스탈린 시대에 지었을 공동주택들은 좁고 낡았다. 버려진 빈집도 많았다. 거리를 왕래하는 주민들보다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이 더 자주 눈에 띄었다.

국경을 넘기 전 머물렀던 중국 훈춘(琿春) 때문에 더 대비됐을 것이다. 훈춘에는 개발 바람과 함께 돈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낮에는 지저분해도 밤거리에는 네온사인이 '비까번쩍'했다. 어디서든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런 소란스러운 풍경은 낯설 게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고, 어쩌면 중국이 한발 앞선 우리의 '자본주의'를 베꼈을 테니까.

그런 훈춘을 떠나 크라스키노에 도착한 뒤 원정대가 묵은 호텔도 동네 여관 수준이었다. 공산품이 귀해서 객실 세면장에는 얇은 면수건 두 장과 새끼손톱만 한 비누만 놓여 있었다. 대원들은 짐을 풀고 식당에 몰려들었다. 패딩 점퍼 차림이었다. 몇몇 대원들은 벗어서 의자 뒤에 걸었다. 메뉴판을 들춰보며 여종업원을 불러 주문하려고 했다. 평소처럼 한 것이다. 그런데 여종업원이 이렇게 말했다.

"식탁에 패딩 점퍼 차림으로 앉을 수 없다. 의자에 거는 것도 안 된다. 백팩도 그렇다. 입구에 있는 클로크룸(cloakroom)에 맡기거나 객실에 벗어놓고 와야 한다."

우리와 다른 식탁 매너로 인한 '해프닝'이라고 넘어가도 된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러시아의 이 궁벽한 마을에도 유럽 문명의 품격(品格)이 살아있구나. 물질적으로 넘쳐나진 않지만 이들은 스스로 존엄을 지킨다.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여기서 우리의 밑천이 드러나는구나. 바깥세상에서 우리가 대접받을 만한지를 평가하는 기준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문제는 돈과 경제만으로는 결코 이런 가치를 구매할 수가 없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이 있지만 밥 못 먹어 굶어 죽는 시절은 지났다.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린다는 말까지 한다. 그럼에도 우리 삶의 품격은 올라간 것 같지 않다. 오직 돈의 가치만 있고 다른 가치들은 거의 사라졌다. 한때 사람다움을 증명해줬던 수양·청빈·절제·인품·도량·헌신·존엄·고상함 같은 어휘는 죽은 말처럼 됐다.

두 번째는 보름 전 일본 아키타현의 가쿠노다테(角館)로 겨울 휴가를 갔을 때의 얘기다. 여러 감상이 없지 않지만 역시 눈[雪]이었다. 이미 건물 지붕마다 60㎝ 이상 눈이 쌓여 있었다. 머무는 동안 눈은 찔끔찔끔 흩날리다가, 돌아오기 전날 밤에는 폭설로 바뀌었다.

새벽녘 잠에 깨어 여관에서 빌려주는 장화를 신고서 산책을 나갔다. 아직 어둠은 덜 걷혔다. 그런데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다. 주민들이 집과 가게 앞의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는 게 아닌가. 맨홀 뚜껑을 열어 그 둘레에 얼어붙은 눈까지도 털어냈다. 내게는 낯설었을 뿐, 일본을 자주 왕래하거나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상적 광경이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구청 공무원들이나 해야 할 일이었다. 심지어 자기 집앞의 눈 치우는 법과 제도를 아무리 만든다 해도 우리는 과연 될까. 이게 우리가 일본을 욕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일본을 따라갈 수 없는 대목이다.

우리는 법과 제도만 만들면, 세금을 퍼붓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걸로 여긴다. 큰 사회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랬고 꼭 거기서 끝났다. 그런 뒤 똑같은 사건은 반복된다. 법과 제도만 떠들지 그 속에서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에 대해서는 입이 없다. 공동체를 위해 시민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행동과 직업윤리가 언급된 적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요구하고 투쟁하는 것만 배웠을 뿐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집단과 진영(陣營) 논리에 너무 쉽게 편입되고, 실질보다는 이념과 선동 구호에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자신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개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게 됐다. 성숙한 사회는 결국 성숙한 개인들이 꽃다발처럼 모여서 이뤄지는 데도 말이다. 새해 첫날에 너무 '사소한 얘기'를 한 것 같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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