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1일 TV에 나와 직접 발표한 신년사를 통해 "올해 북·남 간 대화와 협상, 교류와 접촉을 활발히 해 북·남 관계에서 대전환, 대변혁을 가져와야 한다"며 "중단된 (남북) 고위급 접촉도 재개할 수 있고 부분별 회담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김은 특히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 데 따라 최고위급 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며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 용의까지 밝혔다. 물론 김은 '한·미(韓·美) 군사 훈련 중단, 흡수 통일 시도 포기, 대북(對北) 전단 살포 중단'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래도 올해 남북 관계 관련 발언은 전례 없이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다. 김은 지난 2년 신년사에서도 모두 남북 관계를 언급했지만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정도에 그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9일 통일준비위를 통해 북측에 대화를 제의했고,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다. 북이 이에 호응해옴에 따라 조만간 남북대화가 재개되고 관계 개선이 급진전될 가능성이 커졌다. 북은 지금 안과 밖에 출구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오래전에 무너진 경제는 북한 정권의 통제 밖에서 움직이고, 핵·인권 문제와 대중(對中) 관계 악화로 인한 고립은 최악의 수준이다. 이런 북이 결국 남(南)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시간의 문제였을 뿐이다.

북의 대남 행동은 선의(善意)가 아니라 그들 정권의 전략·전술에 따라 입안되고 실천되는 것이다. 김정은 신년사도 남으로부터 지원을 얻고 한·미·중·일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제재를 흔들어보려는 계산에 따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북의 그런 대남 전략을 평화와 통일의 기회로 만드는 것 또한 우리의 역량이다. 남북이 모두 강조했듯 올해로 광복 70년이자 분단 70년이다. 우리 민족이 남과 북, 어느 길로 가야 할지는 이미 결정돼 있다. 북을 그 길로 조금씩 이끌어 나가 역사의 새 문을 열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분명 기회다.

기회이기는 하지만 한 발짝 한 발짝이 어려운 난관이기도 하다. 북이 남북대화 테이블에 나온다고 해도 모든 문제의 근원인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천안함 도발을 인정하고 연평도 포격과 금강산 관광객 사살을 사과할지도 불투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대화를 핵·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일치된 대북 결의와 조화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남북 문제에서 환상에 젖어서도 안 되지만 미리 체념하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급한 쪽은 북한이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북도 모르지는 않는다. 정부는 이 기본 원칙을 분명히 하되, 유연하고도 열린 자세로 북을 상대하면서 남북 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릴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북의 전략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남북 정상회담이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크다. 북은 김정은의 생각이 전부인 1인 체제다. 결국 박 대통령이 김을 만나 근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남북 관계의 새 장(章)을 여는 열쇠가 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정치적·정략적 남북 정상회담'이란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만큼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넓다는 얘기다.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북이 핵·인권·천안함 문제에서 전향적 자세를 보이고, 개성공단이나 나진·하산 사업과 같은 남북 경협이 확대되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다. DMZ가 일부라도 평화공원으로 바뀔 수 있다면 남북 관계를 바꾸는 대(大)사건이 될 수 있다. 새해 첫날 북의 최고 지도자가 밝힌 '남북 관계 대변혁' 다짐이 결실을 맺을지, 아니면 또 한 번의 허언(虛言)으로 끝날지 7500만 동포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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