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위급 회담 못 할 이유가 없다" 신년사
정부 "의미있는 진전, 당국간 대화부터 열자"

南北 모두 대화 필요성엔 공감… 정상회담까지는 고비 많아
金, 29분연설 통일 17번 언급
南北 언급, 작년 14문장에서 올해 25문장으로 크게 늘어
韓美훈련 중단 등 앞세워 언제든 도발국면 전환 가능성… 전문가 "고위급 접촉이 먼저"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1일 서울 정부청사 에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신년사에 대한 우리 정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진한 기자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1일 서울 정부청사 에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신년사에 대한 우리 정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진한 기자
을미년(乙未年) 벽두부터 남북 정상회담이 이슈로 떠올랐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1일 신년사에서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는 데 따라 (남북 간) 최고위급 회담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김정은은 이날 오전 28분 50초 동안 조선중앙TV를 통해 방송한 육성(肉聲) 신년사에서 "조국 해방 70돌이 되는 올해에 온 민족이 힘을 합쳐 '자주 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정은이 직접 남북 정상회담을 언급한 것은 집권 후 처음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북한 지도자와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어 광복·분단 70주년을 맞는 올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지 주목된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김정은 제1비서가 신년사를 통해 남북 간 대화 및 교류에 대해 진전된 자세를 보인 데 대해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고위급 회담을 포함해 남북 간 모든 관심 사항에 대해 실질적이고 허심탄회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가까운 시일 내에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남북 당국 간 대화가 개최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정은의 언급에 우리 정부가 긍정적으로 호응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실제 김정은의 이날 신년사 내용은 과거에 비해 전향적인 부분이 적지 않다. 김정은은 "북남 사이 대화와 협상, 교류와 접촉을 활발히 해 끊어진 민족적 유대와 혈맥을 잇고 북남 관계에서 대전환, 대변혁을 가져와야 한다"며 "남조선 당국이 진실로 대화를 통해 북남 관계를 개선하려는 입장이라면 중단된 고위급 접촉도 재개할 수 있고 부분별 회담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화와 협상을 실질적으로 진척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도 했다.

김정은은 이날 연설에서 '통일'이라는 말을 17번 썼다. 남북 관계와 관련된 언급은 작년 14문장에서 올해는 25문장으로 늘었다. 2013년 첫 육성 신년사에선 "북남 사이의 대결 상태 해소"를 얘기했고, 작년에는 "북남 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 마련"을 언급했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작년 초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한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통일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정상회담 성사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전망이다. 김정은은 이날 정상회담을 언급하기에 앞서 "전쟁 연습이 벌어지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신의 있는 대화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단 등이 대화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또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정상회담 성과물인 6·15와 10·4선언 준수를 요구했다. 이런 요구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남측에 책임을 떠넘기고 언제든 도발 국면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은 올해가 노동당 창건 70주년임을 강조하면서 "주체 혁명의 최후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총공격전에 떨쳐나서자"며 "전민항전(全民抗戰) 준비를 튼튼히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김정은이 어떤 배경이나 의도에서 정상회담을 꺼냈는지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우선 김정은의 이날 발언은 자신이 처한 대내외적 위기의식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된다. 유엔 북한 인권 결의안 통과, 영화 '인터뷰' 해킹 파문 등으로 북한 체제가 국제적 논란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남북 관계 개선 없이는 대미·대중 관계 개선이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미국은 물론 중국도 상대해 주지 않는 국제 범죄자 처지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의 '역점 사업'인 경제특구 개발에 남한의 투자와 지원을 얻어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는 광복·분단 70주년을 맞아 선제적으로 '통 큰 제안'을 함으로써 남북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북 주민들에게는 '통일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각인하려는 속내도 엿보인다. 김정은은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해 분열된 때로부터 70년 세월이 흘렀다"며 "세기를 이어오는 민족 분열의 비극을 이제 더 이상 참을 수도, 허용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이날 '대(大)통로'라는 표현도 공식적으로 했다. 작년 10월 황병서 등 '3인방'의 인천 방문 때 나온 '대통로' 발언이 자기 뜻에 따라 나온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김정은의 제안을 놓고 남한 내부에서 찬반양론과 남남(南南) 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북이 노리는 점이다. 통일연구원 측은 "김정은 입장에서는 남북 정상회담 제기로 손해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정부가 정상회담에 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렸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분단 70년을 맞아 남측이 주도권을 쥐고 이산가족 상봉 등 분단의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며 "그러려면 박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 등을 통해 8·15 이전에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역제의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올해가 (박 대통령) 집권 3년 차이고 내년 총선, 후년 대선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 소극적으로 나가선 안 된다"고 말했다. 유호열 고려대 교수는 "우리가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반면 박형중 소장은 "자기들 핵은 계속 키우겠다면서 한국은 군사훈련을 중단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우선 고위급 접촉부터 열고 이산가족 상봉이나 천안함 폭침 사과 문제 등을 논의해 가면서 정상회담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오는 5월 러시아 전승 기념일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이 만날 가능성이 우선적으로 거론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두 사람을 공식 초청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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