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科技大서 6개월간 영어 가르친 在美 소설가 수키 김 인터뷰]
"北상류층 자제도 인터넷 몰라… 어떠한 변화 가능성도 못봤다"

- '從北 토크' 신은미와 극과 극
"北이 아주 개방적인 사회? 엘리트인 科技大 학생들조차
평양 사는 부모에 연락 못하고 기숙사서 군대처럼 살더라"

미국 CNN에 출연해 "북한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곳"이라고 증언했던 재미(在美) 소설가 수키 김(43)씨는 9일 "북한에서 어떠한 변화 가능성도 찾지 못했다. 지금의 무자비한 정권이 무너져야 뭔가가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2011년 7월부터 12월까지 평양 과학기술대에서 북한의 엘리트 대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그는 당시 체험을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Without you, there is no us)'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김씨는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북한 내 최고 상류층 자제들조차 자유가 없고, 인터넷이 뭔지도 모르는 데 충격을 받았다"며 "그런 사회가 활기차다는 분이 있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재미 교포 신은미씨가 북한을 찬양하는 듯한 '북한 기행 콘서트'를 열어 종북 논란을 불러일으킨 데 대한 반응이었다. 김씨는 "분단의 슬픔, 갇혀 있는 북한 사람의 모습을 3자적 시각에서 앞으로도 세계에 알리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CNN에 이어 10일에는 미국 코미디센트럴TV의 존 스튜어트가 진행하는 '데일리쇼'에 출연해 북한의 실상을 고발할 예정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약.

재미(在美) 소설가 수키 김씨가 중국 단둥(丹東)에서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서있다. 2011년 7월부터 12월까지 평양 과학기술대에서 영어를 가르친 그는 “북한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곳”이라고 했다. /수키 김 홈페이지
재미(在美) 소설가 수키 김씨가 중국 단둥(丹東)에서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서있다. 2011년 7월부터 12월까지 평양 과학기술대에서 영어를 가르친 그는 “북한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곳”이라고 했다. /수키 김 홈페이지

―북한에서 6개월 동안 살면서 가장 충격적인 일은 무엇이었나.

"엘리트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자유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상류사회조차 극도로 통제받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모두가 고발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극도의 공포 상태였다."

―북한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2002년 기자로서 처음 북한을 방문한 이후 5번 다녀왔다. 중국 옌지에서 탈북자도 취재했다. 상상 이상의 억압, 통제가 북한 사회에 일상화된 듯했다."

―과학기술대 학생들이 인터넷도 몰랐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데.

"2011년 개교 당시 그랬다. 김일성대, 김책 공대 등에서 최고의 학생들만 왔다. 강성대국을 건설한다고 해서 대부분 학생이 공사판으로 나갈 때였지만, 과기대 학생 270명만은 동원되지 않았다. 그만큼 최고 집단이란 이야기다. 그런데도 대학원 과정 10여명만 인터넷을 할 수 있었다. 내가 가르치던 학부 과정 학생들은 인터넷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북한 학생들은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대화 자체를 꺼렸다. 6개월 동안 있으면서 '엄마가 그립지 않으냐' '미국 사람과 결혼할 거냐' '미국에서 북한까지 비행시간은 얼마냐' 정도만 물었다. 철저한 정보 통제로 외부 세계를 모르더라. 페이스북 같은 SNS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외국인도 다 한국어를 쓴다고 믿는 학생도 있었다."

―북한을 몇 번 여행한 신은미씨는 북한이 아주 활기차고 개방적이라고 해서 '종북 논란'을 낳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이야기 들었다. 그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해가 안 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 북한에 들어가는 순간 여권과 휴대폰을 다 줬다. 감시원이 늘 옆에 있었다. 그분이 특권이 있어 자유가 있었을지 몰라도 북한 주민들은 그렇지 않다. 옆 마을에 가려고 해도 여행증이 있어야 한다. 과기대 학생들조차 부모가 평양에 있는데 연락 한번 못 하더라. 군대처럼 기숙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유롭나."

―북한에 있을 때 여행은 못 했나.

"보여주는 곳만 봤다. 묘향산, 금강산, 대동강변 등 짜인 일정대로 단체로 움직였다. 2008년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평양 연주 취재 때는 36시간 동안 호텔과 행사장, 지하철 정도 견학하고 일절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다면 북한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지 않나.

"북한을 깊게 알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과의 생활 덕분이었다. 일상 대화에서 나오는 북한, 학생들이 쓴 글에서 보는 북한이면 충분했다. 북한이 끔찍스럽다고 한 것은 학생들에게 어떤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생각의 자유도 없었고, 창조적 생활이란 것은 불가능했다. 학생들을 무기력한 바보로 만드는 이면을 봤다."

―북한이 변화할 가능성은 없나.

"나는 찾지 못했다. 한쪽으로 조종받는 사회다. 이걸 깨뜨려야 사회가 바뀔 텐데, 전혀 구멍을 보지 못했다. 인간의 존엄성 박탈이 심각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나.

"정권이 바뀌지 않으면 힘들지 않겠나. 변화를 모색하려면, '위대한 지도자'를 신처럼 숭배하는 무자비한 정권과 타협해야 할 텐데, 결국은 북한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해야 가능한 일이다."

―북한 체제를 고발한 계기가 있나.

"한국은 유일한 분단국가다. 나는 미국에 이민했다. 헤어짐에 예민했다. 우연히 북한에 갔는데 '이런 땅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로서 제3자적 시각에서 분단의 슬픔을 해석하고, 갇혀 있는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수키 김

1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수키 김(Suki Kim·43)은 뉴욕의 컬럼비아대를 졸업했다. 2003년 이민 온 부모의 죽음을 접한 젊은 한인 2세의 고뇌를 다룬 소설 ‘통역사(The Interpreter)’로 데뷔했다. 이 소설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고, 한국·네덜란드·프랑스·일본어로 번역됐다. 2002년 기자로 북한을 취재한 이후 5차례 방문했고, 6개월간 생활한 경험을 책으로 펴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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