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외화벌이 현장… 박국희 특파원 르포]

4000여명이 공사판서 중노동
"월수입 대부분 '北상납'… 밀주장사라도 해야 먹고살아"

뙤약볕서 매일 14시간 중노동… 일 끝나도 北방송 보며 사상교육
철조망 쳐진 숙소서 단체생활, 칼국수·소금으로 끼니 해결
보위부 요원이 철저히 감시… 北근로자 "장소만 다를 뿐 체제는 北과 다를 바 없어"

박국희 특파원
박국희 특파원
지난 4일 쿠웨이트 수도 쿠웨이트시티에서 북서쪽으로 30㎞ 떨어진 자흐라시 외곽. 사막 한복판에 수십만평 규모의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다.

땅거미가 진 오후 5시 방글라데시·파키스탄·스리랑카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두 작업을 마치고 돌아간 공사 현장에서 "하나, 둘" "으이쌰" 같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같이 깡마르고 왜소한 몸집의 50·60대 북한 노동자들이었다.

모스크(이슬람사원)를 짓고 있던 이들에게 다가가자 "차이나(China)? 자판(Japan)?" 하며 관심을 보였다. 그들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자 "남조선? 아니 어케 남조선에서 여까지 왔어?"라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한 60대 노동자 팔뚝에는 북한 인공기의 별 모양 위로 '군인정신' '일당백(一當百)'이라 쓰인 빛바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현재 쿠웨이트에는 4000여명의 북한 노동자가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 이들의 한 달 임금 150KD(쿠웨이트디나르·약 57만원) 중 62%가 국가계획납부금으로 공제되고 충성자금으로 35~70달러(4만~8만원)를 상납한다. 식비 15KD(5만7000원) 등을 제하면 실수령액은 월급의 25%인 38KD(14만원)에 불과하다. 김정은 정권이 40여개국 5만~6만명의 해외 노동자로부터 거둬들이는 수익만 연 2조원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밀주 주문받는 北남자들 - 지난 6일 쿠웨이트 중부 자흐라시(市) 인근 공터에 북한 남성들이 모랫바닥에 앉아 있다. 자신들이 제조한 밀주인 일명 ‘싸대기’를 팔기 위해서다. 맨 오른쪽 남성은 휴대폰 2개를 들고 쉴 틈 없이 밀주 주문을 받았다. 북한 노동자들은 김정은 정권의 임금 착취로 생활비가 부족하자 주류 판매가 엄격히 금지된 현지에서 밀주를 만들어 팔고 있다. /박국희 특파원
밀주 주문받는 北남자들 - 지난 6일 쿠웨이트 중부 자흐라시(市) 인근 공터에 북한 남성들이 모랫바닥에 앉아 있다. 자신들이 제조한 밀주인 일명 ‘싸대기’를 팔기 위해서다. 맨 오른쪽 남성은 휴대폰 2개를 들고 쉴 틈 없이 밀주 주문을 받았다. 북한 노동자들은 김정은 정권의 임금 착취로 생활비가 부족하자 주류 판매가 엄격히 금지된 현지에서 밀주를 만들어 팔고 있다. /박국희 특파원

작업 현장 인근 철조망이 쳐진 컨테이너 숙소에서 단체 생활을 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매끼니를 주로 칼국수로 해결한다. 육수를 만들 환경이 안 되기 때문에 물에 삶은 칼국수를 그냥 소금에 찍어 먹는다. 계란, 소시지, 당근 생채 등이 반찬이다. 노동자 20~30명당 1명씩 파견되는 보위부 요원의 철저한 통제와 감시 속에 일과 후에도 위성방송으로 조선중앙TV를 보며 사상 교육을 받고 있다. 이들은 하루 12~14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쿠웨이트 노동 경험이 있는 한 탈북자는 최근 국내의 북한 인권단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장소만 옮겨졌을 뿐이지 체제는 북한과 똑같다. 시커먼 밤에 쿠웨이트에 내려 다음 날부터 일했는데 허허벌판에 있으니까 외국이라는 느낌이 하나도 안 들었다."

김정은 정권의 임금 착취로 생활비는 물론 상납금조차 부족해지자 북한 노동자들이 현지에서 손댄 것이 바로 밀주(密酒) 판매다. 쿠웨이트에서 음주나 주류 판매는 마약을 밀매하는 것과 같은 중범죄이지만, 중동 국가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유통시키는 밀주 '싸대기'는 이미 현지에서 고유명사화된 지 오래다.

쿠웨이트 자흐라시(市) 외곽 신도시 건설 현장의 북한 노동자들이 8일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숙소로 이동하고 있다. 쿠웨이트에는 4000여명의 북한 근로자가 있다. /박국희 특파원
쿠웨이트 자흐라시(市) 외곽 신도시 건설 현장의 북한 노동자들이 8일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숙소로 이동하고 있다. 쿠웨이트에는 4000여명의 북한 근로자가 있다. /박국희 특파원

"유 노우(You know) '싸대기'?"

지난 6일 스리랑카 출신의 쿠웨이트 택시기사 하난(39)이 명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말했다.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쿠웨이트에서 음주나 주류 판매 행위는 마약을 밀매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적발 즉시 강제 추방된다. 하지만 쿠웨이트는 물론 인근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같은 중동 국가들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유통시키는 밀주(密酒) '싸대기'는 이미 현지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경제적 궁핍에 '싸대기' 밀매

북한 노동자들은 ‘싸대기’라 불리는 밀주를 만들어 팔고 있다. 지난 6일 쿠웨이트 자흐라시 인근에서 북한 남성에게 돈을 주자, 이 남성은 차 트렁크에 ‘싸대기’ 두 박스를 옮겨 싣고 재빨리 사라졌다. /박국희 특파원
북한 노동자들은 ‘싸대기’라 불리는 밀주를 만들어 팔고 있다. 지난 6일 쿠웨이트 자흐라시 인근에서 북한 남성에게 돈을 주자, 이 남성은 차 트렁크에 ‘싸대기’ 두 박스를 옮겨 싣고 재빨리 사라졌다. /박국희 특파원
북한 노동자들이 밀주에 손을 댄 것은 김정은 정권의 임금 착취로 인한 상납금 마련과 이로 인한 생활비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북한 노동자들은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등 외국인 노동자들을 중간 유통망 삼아 조직적으로 밀주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하난은 "싸대기를 만드는 북한 친구를 알고 있다"며 "휴일인 금요일마다 손님이 많기 때문에 북한 친구가 아주 바빠진다"고 했다. 하난의 택시를 타고 그들에게로 향했다. 택시는 쿠웨이트 외곽 자흐라의 한 공터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쉬고 있던 북한 노동자 3명 앞에 멈춰 섰다.

기자의 신분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영어를 쓰며 일본인이라 국적을 속였다. 휴대전화 2대를 번갈아 사용하며 싸대기의 주문을 받던 한 명이 "야, 지금 술 어디서 받을 수 있나"라며 일당과 연락을 취했다. 그는 남쪽으로 50㎞ 떨어진 와프라 지역으로 가라고 했다.

와프라 지역의 건설 현장에 도착하자 선글라스를 낀 북한 노동자 한 명이 픽업트럭(높이가 낮은 짐칸을 갖춘 소형 트럭)을 끌고 다가왔다. 그는 차량을 서로 바꿔 운전할 것을 요구했다. 얼떨결에 바꿔 탄 북한 노동자 차량에서는 북한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도로 한쪽으로 택시를 몰고 가더니 미리 대기하고 있던 다른 북한 차량 안에서 생수병 12개가 들어 있는 박스 2개를 재빨리 꺼내 택시 트렁크에 옮겨 실었다.

선글라스 남성은 한 달 월급과 맞먹는 28KD(10만원)를 싸대기 값으로 챙긴 뒤 다시 차량을 바꿔 타고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싸대기 한 병당 1KD(4000원)꼴인데, 시중 암시장에서는 이보다 5배 정도 비싼 5KD(2만원)에 팔리고 있다. 쌀·누룩·설탕 등으로 만든 싸대기는 위스키와 고량주를 섞은 맛이 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 노동자들은 중동 당국의 특별 관찰 대상이다. 한 달에도 수차례씩 밀주 제조 일당이 체포됐다는 뉴스가 보도돼 한국 교민들의 이미지까지 안 좋아질 정도다. 2008년에는 쿠웨이트 경찰이 밀주 제조 현장을 급습하기 위해 북한 노동자 숙소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90여명과 집단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한 북한 노동자들의 범법 행위는 밀주 제조를 넘어 건설 현장의 자재 횡령이나 일반 절도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며 현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쿠웨이트의 일부 해외 노동자 고용 업체에서는 각종 일탈 행위 탓에 '추방 리스크'가 커진 북한 노동자의 고용을 꺼리는 분위기도 생기고 있다.

◇3년 벌어 3만원 점퍼 하나

5일 자흐라시 외곽의 '프라이데이 마켓(Friday Market)'. 현지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찾는 일종의 벼룩시장이다. 아랍권 휴일인 금요일만 되면 북한 노동자들 역시 쇼핑하러 온다. 물론 대부분은 보위부 요원들의 감시 아래서다. 이들에게 금요일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이다.

 

쿠웨이트에 나와 있는 북한인들(오른쪽)이 휴일이었던 지난 5일 시장에 나와 물건을 살피고 있다. 말쑥한 옷차림에 김정일 배지를 단 것으로 보아 간부급이나 보위부 요원으로 추정된다. /박국희 특파원
쿠웨이트에 나와 있는 북한인들(오른쪽)이 휴일이었던 지난 5일 시장에 나와 물건을 살피고 있다. 말쑥한 옷차림에 김정일 배지를 단 것으로 보아 간부급이나 보위부 요원으로 추정된다. /박국희 특파원

평양에 14세 아들이 있다는 40대 C씨가 비닐봉지 하나를 보여줬다. 봉투 안에는 검은색 인조 가죽점퍼가 들어 있었다. C씨는 "다음 달이면 3년 근무를 마치고 평양에 돌아간다"며 "북조선 날씨가 추워 하나 샀다"고 했다. 8KD(3만원)를 줬다고 했다.

C씨는 부인을 위한 선물을 사려는 듯 여성용 신발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관뒀다. 3.5KD(1만4000원)라는 상인의 말에 1.5KD(6000원)에 달라며 손짓을 해보지만 여의치 않았다.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고 묻자 C씨는 "많이 모으지 못했다. 평양의 가족에게 인편(人便)으로 월급 절반을 부치는 데다 여기에서도 생활비가 필요해서…"라고 했다. 한국 돈으로 3000원쯤 하는 현지 담뱃값도 부담이라던 그는 "이거 아껴서 얼마나 모으겠느냐"며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C씨는 변변한 운동화도 없어 슬리퍼 차림이었다. 치아 상태도 엉망이었다. 원래 나이보다 10년은 더 들어 보였다. 그는 "뇌물을 주고 일과 후에 부업이라도 해보지 그랬냐"는 물음에 "힘들어서 못 한다. 여름엔 50도까지 올라가는데 사람 살 데가 못 된다"고 했다. 가끔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던 가족과 3년 만에 만날 생각에 C씨는 간간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외국인 노동자의 전시장과도 같은 쿠웨이트에서도 북한 노동자들 행색은 최하위 수준이다. 월급의 3% 정도만 고용주에게 수수료로 떼이는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의 경우 평균 250KD(100만원)를 받는다. 북한 노동자의 6~7배 수준이다. 생활의 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시장 곳곳에서는 북한 노동자들과 상인들 간에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물건을 슬쩍 훔치다 현장에서 적발돼 멱살잡이가 벌어지고, 영어나 아랍어로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다 보니 대충 돈을 던져주고 양말·속옷 등을 집어 가다가 뒤늦게 제지당하기 일쑤였다.

반면 빳빳한 셔츠에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단 채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간부급 노동자들도 보였다. 직장장·작업반장 등의 직책을 가진 이들은 월급을 분배하거나 작업량을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같은 노동자들로부터 뇌물을 챙기거나 상납을 받는데, 이를 가족의 선물 구입용이나 자신들의 출세용 뇌물로 다시 쓴다고 한다. 이들은 선글라스나 시계 같은 물품에 관심을 보였다. 왜소한 체구에 삼성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던 한 남성은 "여기 옷이 (커서) 맞는 게 없다"며 동료와 함께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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