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김대중 고문

年金·無償복지·低출산까지 국가에 요구만 하는 현실에
原電 합의와 맞춤형 給食의 '自助的 시민 의식' 돋보여
경제·안보·법치 難局인데 '나라 걱정' 당연하지 않나

우리는 '애국심(愛國心)'을 거론하면 국수주의자 취급을 받거나 정치권력 또는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것으로 치부되던 우울한 시대를 살았다. '다른 집단이나 민족에 대해 배타적 우월감을 자랑하는 국수주의적 애국심' '국가에 대한 맹목적·무비판적 충성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애국심' '정권 유지 수단으로서의 기회주의적 애국심'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애국심'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애국심을 얘기하면 고리타분한 보수 꼴통이 되고 이익집단 또는 '있는 사람'의 대변자가 되는 세상에서 '애국'은 진부하고 식상한 개념이었다. 하긴 다변화된 세상에서 '태어난 땅'에 대한 소속심과 충성심이 없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닌 이상 '애국심'은 우파의 머리띠에 쓰인 구호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했음 직하다. 어쩌다 '나라 사랑'이라는 말이 이처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굳이 '애국심'은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 하지만 지금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직시하는 최소한의 현실 인식과 자아(自我)의식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할지는 견해가 달라도 '나라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을 우국심(憂國心) 또는 사국심(思國心)이라고 해도 좋다.

나라의 경제가 걱정이다. 나라의 안보도 걱정이다. 나라의 안전 의식, 질서, 법 집행도 걱정거리다. 여기서 나라는 정부도 아니고 집권 세력도, 기득권 사회도 아니다. 나라는 우리가 사는 터전이고 직장이고 함께 사는 공동체고 그것을 감싸주고 보호해주는 울타리다. 나를 태어나게 한 '어머니'다. 그것이 나라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 지금 동네북이다. 나라의 관리를 책임진 정부의 잘못도 있고, 세계적 환경 탓도 있다. 주변 나라들의 신(新)제국주의도 사태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우리 국민 스스로도 나라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나라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다. 일이 잘못되면 나라 탓이고, 나라가 모든 손해를 물어내야 한다고 한다. 나라 재정이 거덜나게 됐는데도 내 연금에 손댈 수 없다거나 학교 급식, 보육 등 여기저기서 무상(無償)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다. 아기 안 낳는 것도 나라 사정 탓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무슨 사고가 났다 하면 먼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그다음 대책위, 보상금 등으로 이어지는 순서에 익숙해졌다. 모두 나라 잘못이고 대통령 탓이다. 11월 중순 어느 날 서울 세종로와 시청 앞 일대에서 같은 시간에 8건의 데모와 집회가 동시에 진행되고, 전국에는 100여개의 집회 및 시위가 벌어지는 곳에서 이 나라의 모든 주먹은 나라를 향해 불끈 내질러지는 듯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일간신문 유머난에 실린 것이다.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 A나라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 B에서는 남편이 상대편 남자를 죽였다. C에서는 두 사람 다 죽였다. D에서는 이혼을 했다. E에서는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애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에게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나라에 많은 것을 요구하려면 그만큼 나라의 권위를 인정해줘야 앞뒤가 맞는다. 우리는 나라와 대통령과 그에 준하는 국가기관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는가? 오히려 나라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대통령 알기를 우습게 아는 풍조가 있다. 이것은 비판과는 다르다. 판사가 대통령을 '가카 새끼'라고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게다가 이런 세력의 배후에는 그것을 부추기는 집단들이 있어 왔다.

이래서는 국가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케네디가 말한 것처럼 '나라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요구하기 전에 당신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까지 안 가도 좋다. 나라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목숨을 바치라는 식의 맹목적 애국심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 구성원 각자 레벨에서 '스스로를 도울[自助·자조]'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엊그제 발표된 경북 울진의 원전(原電) 추가 건설 합의와 울산의 맞춤형 급식 정착 뉴스가 새삼 우리의 눈과 귀를 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안의 핵심은 덮어놓고 나라에 모든 짐을 지우거나 무조건적 반대라는 구태(舊態)에서 벗어나 지방자치단체가 할 수 있는 것과 정부가 할 것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스스로를 돕는' 노력에 있다. 그것이 바로 현대적 의미의 애국심이다.

지금 나라 사정은 위태롭기까지 하다. 경제가 나아지리라고 말하는 전문가는 한 사람도 없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호전적 북한과 맞서야 하는 데다 미국과의 유대에 잡음이 발생하는 안보 문제는 정말로 난제 중의 난제다. 국민의 기강과 질서 의식, 법치 의식은 크게 떨어져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첫걸음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관심, 조금 참고 기다리는 자세, 스스로를 책임지는 노력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민주 의식과 결합된 시민적 우국심'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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