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從北)이라는 단어는 정확한 정의(定義)가 없습니다. 다만 ‘종북주의’가 신념의 문제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한때 종북주의자들이 법정에서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 만세!”라고 외치는 게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추가로 처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신념을 내보이기 위해 판·검사 앞에서 ‘김정일 만세’를 외쳤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신념이 아니라 ‘비즈니스’를 위해 종북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행성 게임사이트 운영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심으로 북한의 김씨 왕조를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생계를 위해 북한 공작원과 접촉하거나 충성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들의 ‘종북 비즈니스’가 사이버테러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8월 북한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으로부터 악성코드(컴퓨터에 악영향을 끼치는 소프트웨어의 총칭)가 담긴 프로그램을 사들여 국내에 무차별 유포한 혐의로 붙잡힌 유모(43)씨 등 3명이 대표적입니다.

2009년 7월 8일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의 홈페이지를 공격한 DDoS(분산서비스거부)공격의 개요를 경찰이 설명하고 있다.
2009년 7월 8일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의 홈페이지를 공격한 DDoS(분산서비스거부)공격의 개요를 경찰이 설명하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유씨는 2011년 4월부터 최근까지 조선족 브로커를 통해 북한 공작원과 접촉, 사행성 사이트에서 상대방의 패를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악성 프로그램을 국내로 들여와 유통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일당은 상대방이 북한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임을 알고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북한 공작원들이 시세(時勢)보다 훨씬 싼 3900여만원에 프로그램을 제공해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북한 공작원들은 프로그램에 악성코드를 심어, 국내에 대량의 좀비PC를 양산하려는 속셈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유씨 등이 온라인에 뿌린 악성 프로그램이 언론사와 은행·보험사 사이트를 동시 마비시킨 3·20 사이버테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악성프로그램을 분석한 결과, 3·20 사이버테러 당시 악성코드의 유포지로 사용된 서버의 인터넷 주소(IP)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공안당국은 북한 측이 중국에 조선○○무역회사라는 위장 IT업체를 설립, 우리 군사시설 등 중요 기관이나 인사에 대한 해킹을 벌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2012년에도 사행성게임 프로그램 업자 조모(39)씨가 악성코드가 담긴 게임 프로그램을 북한 정찰총국 공작원으로부터 사들여 국내에 살포한 혐의로 붙잡힌 일이 있었습니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조씨는 게임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북한 정찰총국과 연계된 중국 내 게임업체에 프로그램 개발을 의뢰했고, 북한 공작원들을 만나 2000만~3000여만원을 주고 악성코드가 숨겨진 게임 프로그램 10여 개를 사들여 국내로 들여왔습니다.
 

북한의 DDoS(분산서비스거부) 공격을 막기 위해 2009년 7월 경기도 과천에 있는 KT 망관제선터에서 직원들이 KT망 트래픽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
북한의 DDoS(분산서비스거부) 공격을 막기 위해 2009년 7월 경기도 과천에 있는 KT 망관제선터에서 직원들이 KT망 트래픽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

그는 김정일이 사망하자 “위대한 민족의 영도자 김정일 장군께서는 현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시었으며 불세출의 선군영장, 자애로운 인민의 어버이”라는 내용의 조전(弔電)을 두 차례에 걸쳐 북한 공작원에게 전송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씨를 이렇게 만든 건 역시 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퇴한 뒤 사기·절도 등 범죄의 길에 빠져들었던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 등 종북(從北)관련 행적이나 운동권 경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 구속된 학군 장교 출신 전모(36)씨도 이와 유사한 수법으로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됐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제작한 온라인 게임 관련 프로그램을 국내 사용자들에게 판매해 얻은 수익금 1억6000만원을 북한에 전달하고, 조달청의 전자 입찰 시스템 관련 자료 등 비밀 정보를 넘긴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경위도 ‘생계’였습니다. 그는 “자동 사냥 프로그램이 잘 구동되지 않아 문의하니 북측에서 금전 이외의 자료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쌍둥이를 포함해 4남매를 키우고 있어 생계 때문에 중간에 거래를 그만둘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공안 관계자는 “최근 붙잡힌 사행성 사이트운영자들은 종북 행적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단순히 돈을 벌 수 있다면 북한에 이용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일을 벌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념으로 종북을 하는 이들과는 다른 형태라는 겁니다. 이 관계자는 “최근엔 북한 공작원들도 이를 알고 돈이 급한 생계형 종북주의자들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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