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외교 무대에서 북한 핵 문제가 갈수록 '잊힌 현안'처럼 다뤄지고 있다. 10~1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태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10일 시진핑 중국 주석, 11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차례로 만났다. 12일엔 시 주석과 오바마 대통령이 별도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북핵 문제 해결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한국·미국·중국 사이에 연쇄 정상회담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회담에서 다뤄진 북핵 문제는 의례적인 외교 수사(修辭)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북한이 핵 포기라는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노력을 강화해 나간다"(한·중 회담), "북핵에 반대하며 한·미 공조에 변함이 없다"(한·미 회담)는 등 지난 몇 년간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고 또 들었던 얘기들을 되풀이했다.

12일 미·중 정상회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 주석과 오바마 대통령은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중은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재확인했다"고 했다. 그나마 이 내용도 외신 기자의 질문이 없었다면 바깥에 공개되지 않을 뻔했다. 북핵 문제는 미·중 간 우발적 군사 충돌 방지 방안, 홍콩 시위, 기후 변화 대처 등의 다른 이슈에 가려 우선순위가 한참 뒤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시 주석은 이날도 6자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강조했다.

6자회담은 지난 6년 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난 가장 큰 이유는 6자회담 개최 조건을 둘러싼 미·중 간의 이견(異見) 때문이다. 미국은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북을 믿을 수 없으니 북이 회담에 앞서 일부 비핵화 조치 등을 통해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비핵화를 약속하고 매년 수십만t의 중유와 식량 지원을 받으면서 비밀리에 우라늄 방식의 핵개발을 추진해 온 북의 전력(前歷) 등을 감안하면 이런 미국의 요구는 당연하다. 그런데도 중국은 일단 6자회담부터 먼저 열자는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미·중은 이런 입씨름을 하면서 몇 년을 허송(虛送)했다. 그 사이 북은 핵탄두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실을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지금의 긴박한 상황을 생각하면 이번 APEC 기간 중 한·미·중 정상 사이에 오간 북핵 관련 대화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미·중이 과연 북핵 해결 의지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결국 이런 미·중을 움직이게 하려면 북핵의 제1 당사자인 대한민국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다. 북핵 회담의 방식부터 개최 조건, 궁극적 해법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먼저 구상을 내놓고 관련국들을 설득해 나가는 주도적 역할을 맡아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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