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눈과 귀'를 붙들고 있는 최고 정보 책임자가 직접 북한과의 교섭에 나선 것이다. 정보 관계자가 외교 교섭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겨온 미국 대외 협상의 전통도 이번에 깨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6년간 북이 먼저 핵 문제 등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며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왔다. 북을 향해서는 눈길 한 번 줄 것 같지 않던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최고 정보 책임자를 북한에 특사로 보내 미국인 석방 교섭을 타결 지었다. 외교 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호오(好惡)가 아니라 국익(國益)이라는 점을 절감케 하는 대목이다.

중·일(中·日) 관계도 미·북 접근만큼 전격적이다.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은 지난 7월 방한했을 때 일본 아베 내각의 퇴행적 과거사 인식과 일본의 침략사(史)를 거론하면서 한·중이 일본에 함께 맞서자고 제안했었다. 시 주석은 얼마 전 한 행사에서 일본을 '도적(盜賊)'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랬던 시 주석이 10~11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다. 2012년 말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첫 중·일 정상회담이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APEC 기간 중에도 아베 총리와 별도의 정상회담을 가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

중·일은 이번 정상회담을 위한 막후교섭에서 양측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서온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 등에서도 큰 틀의 방향을 정리했다. 중·일 간 4개 합의 사항을 보면 센카쿠 문제는 양측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위기관리 메커니즘을 만들기로 했고, 과거사 문제는 '역사를 직시하고 미래 지향의 정신'에 따르기로 했다. 중국은 일본이 영토 문제 등에서 양보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일본 역시 2년여 만에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것 자체를 외교적 성과로 여기는 분위기이다. 이제 중·일 관계는 정상 간에 얼굴조차 맞대지 않는 외교 파행을 넘어서 서로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정부는 며칠 사이 급박하게 돌아간 미·북 접근과 중·일 정상회담에 대해 그 자체만으로는 "근본적인 정세(情勢)의 변화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미·북, 중·일 관계 모두 그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미국이 북핵과 인권 문제 등에 대한 기존 입장을 하루아침에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이 미국인 3명을 풀어준 것은 김정은을 비롯한 북 권력 핵심 인물들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해야 한다는 유엔 논의가 본격화되는 다급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최근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패한 오바마 정부가 임기 말에 외교적 성과를 위해 북한 문제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미·북 협상이 본격화되고 한국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과거에도 수없이 되풀이됐던 일이다.

중·일 관계 역시 정상회담 한 번으로 두 나라 간 갈등이 한꺼번에 풀리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군사적·외교적 정면 충돌을 피하고 대화 창구가 가동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간 중국과 보조를 맞춰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지 않는 것을 주요한 '외교 카드'로 삼아온 대한민국의 외교다. 일본은 올여름까지만 해도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재촉했지만 최근에는 그 열의가 식은 듯하다. 중·일 정상회담이 성사 가능한 현실로 다가오면서 생긴 변화다. 그런데도 우리 외교는 "중국이 일본의 정상회담 요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중·일 관계의 큰 흐름을 무시한 채 우리만의 '외교의 원칙'을 강조해 왔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서 진솔한 반성과 사과를 해야 한다는 데 이견(異見)을 가진 국민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느냐다. 지금 이 정부의 모습은 앞뒤가 꽉 막힌 요령부득의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미·북 해빙 무드와 중·일 접근을 지켜보면서 국민은 불안하고 답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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