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 문화부 차장
김기철 문화부 차장
지난 주말 서강대에서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의 공동 주제는 '국가 권력과 역사 서술'이었다. 최근 한국사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을 둘러싼 논쟁과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國定化) 추진 움직임에 대해 역사학계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는 자리였다. 전국역사학대회는 국내의 대표적 역사 관련 학회들이 매년 한 차례 여는 역사학계의 최대 학술 행사다.

대회 개최 하루 전 역사학회 등 16개 학술단체 이름으로 이메일이 날아왔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의 중단을 엄숙히 촉구한다'는 제목의 성명서였다. '세계적으로 국정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사상 통제가 심한 북한이나 베트남 등 일부 국가뿐이다' '교과서 국정제는 5년마다 교체되는 정권의 개입과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제도이다'….

개인적으로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편찬하는 국정화는 시대 흐름을 거스른다고 생각한다. 10여 년 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을 취재할 때도 당시 국정 체제였던 우리 한국사 교과서에 비해 일본은 검인정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웠다. 2007년 우리도 한국사 교과서를 검정으로 바꿨는데 다시 국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퇴행적이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성명서는 핵심을 피해갔다. 지난 2003년 도입된 고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부터 작년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까지 근현대사 분야에서 수없이 제기된 좌(左)편향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이다. 어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정부의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쓰면서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사회주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고 썼다. 이승만·박정희 독재에 대해선 서슬 퍼런 비판을 하면서도 북한의 세습 정치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작년 10월 검정을 통과한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4종에는 유관순 열사가 통째로 빠졌다. "친일파가 유관순을 발굴해 이화학당 출신의 영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어느 역사학자의 '친절한' 설명이 국민을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학계의 성명서가 쏟아져 나왔지만 "역사 교과서의 편향적 기술에 책임을 느낀다. 균형 잡힌 역사관을 가르치도록 힘쓰겠다"는 내용이 담긴 적은 없었다. 도리어 총리 후보를 '친일파'로 몰아서 낙마시키는 데 일조하는 성명서를 학회 명의로 발표해 정치적 편향 시비를 자초한 게 한국사 관련 단체들이다.

이번 역사학대회에서 발표에 나선 진보좌파 학자는 '역사 서술의 국정(國定)에 유혹을 느끼는 수구 집단' '교과서 국정화는 수구 세력의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몰아붙였다. 거리에서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학자가 쓸 표현은 아니다.

다행한 일은 이날 첫 발표에 나선 원로 역사학자가 "연구에 몰두해야 할 전문가조차 '운동의 학문 전사(戰士)'를 자처한다" "역사 논쟁을 성명 운동이나 시위로 해결하려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며 자성(自省)을 촉구한 것이다. 그는 "역사적 논쟁이나 토론은 전문성의 바탕 위에서 진행돼야 한다"면서 견해가 다른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할 것도 주문했다. 좌편향 교과서를 두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학문 전사'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