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진 정치부 기자
황대진 정치부 기자
판문점에는 남북 직통 전화(팩스 포함)가 33회선 깔려 있다. 남북 당국과 적십자의 연락사무소, 해사(海事)당국, 항공관제, 회담지원 등 분야별로 이 선을 나눠 쓰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선들은 거의 남측 송신(送信) 전용이다. 북에서 내려오는 중요 메시지는 서해 군(軍) 통신선으로 들어온다. 북한 국방위원회가 보내고 남측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수신자다. 올 들어 북한은 크고 작은 일이 터질 때마다 이 라인을 이용했다.

북한의 지난 2월 제1차 남북고위급 접촉 제안도 서해 군 통신선을 통해 들어왔다. 이어 서해 북방한계선(NLL) 교전 후 북한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군사회담을 제안할 때(지난 7일), 대북 전단 살포에 항의하는 전통문을 보낼 때(지난 26일)도 이 라인을 이용했다. 불평을 쏟아낼 때도 대화를 제의할 때도 수신자는 청와대였다. 이 채널을 통해 남북고위급 접촉부터 서해교전, 대북 전단까지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 북한은 지난 15일 남북군사회담도 자신들은 군부의 김영철 정찰총국장을 내보내면서 남측에서는 청와대 김관진 실장이 나오라고 요구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남북 회담을 그렇게 많이 했지만 북이 직접 청와대를 상대로 얘기한 적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이 청와대만 상대하겠다고 나선 데는 노림수가 있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전문가는 "북한은 5·24조치와 금강산 관광 중단 등 현안을 일괄 타결식으로 풀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대의(大義) 아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사건 등 자신들이 저지른 도발을 일일이 사과하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가려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통 큰 결단'이란 말을 즐겨 쓰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격(格)'을 높여준 측면도 있다. 작년 6월 통일부 장관이 수석대표인 남북장관급회담은 날짜까지 합의됐지만 청와대는 막판 '격' 논란을 이유로 회담을 무산시켰다. 이어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회담에서도 우리 측 대표를 별다른 설명 없이 중간에 교체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문제를 풀려면 청와대와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정부 주변에서도 통일부는 '핫바지'이고 대북 정책은 청와대가 직접 주무른다는 얘기가 나왔다.

청와대가 남북 관계 전면에 나서는 경우 장점도 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박근혜 대통령의 대리인이 바로 만난다는 점에서 신속한 의사 결정이 가능하다. 또 합의 사항이 있을 경우 이를 집행할 때도 효율적이다.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회담에서 '성과'에 대한 압박이 커질 수 있고 이는 '잘못된 합의'로 이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남북관계가 잘되든 못 되든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천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북과의 대화에 너무 목매는 것 같다' '저자세로 허둥지둥댄다'는 지적들이 이미 나온다.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가 일이 잘못될 경우 돌아설 공간이 없다. 밑에 맡길 것은 맡겨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청와대가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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