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권 '대화'에 집착해… 北은 60년간 변한 게 없는데 그쪽 제의·條件에 끌려다녀
대응책 없는 형식주의 떨치고 對北 대화·협력·원조 측면서 능동적·선제적으로 끌고 가라

김대중 고문
김대중 고문
지난 토요일 임진각과 통일동산에서 벌어진 대북 전단 살포 단체와 저지 세력 간의 충돌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 통일을 감당할 준비가 돼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통일의 여건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 대한민국은 이를 받아들일 준비는커녕 그것을 민족의 발전적 역량으로 소화할 수 있을 것인지도 확실치 않아졌다.

남과 북 간에도 서로의 체제적 차이, 정치적 이질감, 기득권에 대한 집착의 간극이 엄청난데 거기다가 남쪽 내부의 갈등과 적대감, 문화적 차별 의식 등이 깊게 내재(內在)해 있어 남북의 통일은 물론 공동보조마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낀 것이다. 더 나아가 과연 대한민국 사람들이 통일을 그토록 염원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통일이 우리 민족 전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과연 있는지 헷갈리는 지난 주말이었다.

처음에는 남북 대화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지금이 과연 시의적절한 것인지, 접북(接北) 지역 주민에 대한 피해를 충분히 고려한 것인지의 문제인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능히 타협되고 조정될 수 있는 사안인데도 물리적 충돌로까지 갔다. 그렇다면 그것은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전단 살포 자체에 대한 이견이 그 뒤에 깊게 도사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허점들을 우리의 내부에 안고 북측과 대화를 하고 화해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허구적이다. 아니, 위험하다.

역대 정권은 늘 '북한병(病)'에 걸려 왔다. 좌파 정권은 즐거이 그 병을 앓았지만 우파 정권은 늘 정권 후기에 정치적 탈출구로 북한병을 이용해왔다. 특히 우파 정권은 북한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통일에 관심이 없다느니 민족의식이 박약하다느니 하는 좌파나 대화론자들의 상투적 비판을 너무 의식해, 또는 스스로 진보적이거나 리버럴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정치적 사치심이 작동해 '대화'를 거론해왔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60여년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핵으로 무장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총질을 해왔는데도 우리 정치권과 일부 좌파는 '대화'가 '보험'이고 '수용'이 '평화'인 양 선전하며 대북 유화에 매달려왔다. 지금 박근혜 정부도 결국 그 병(病)을 이기지 못하고 '대화' 카드를 꺼내 든 형국이다. 아시안게임에 느닷없이 나타난 북한 핵심 3인방을 만나자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애기봉의 크리스마스트리를 노후를 이유로 철거하더니 마침내 대북 전단 살포에 부정적으로 돌아섰다.

북한이 어떤 형태로든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거나 우리에게 진정 유화의 제스처를 보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들을 주시하고 반응해야 한다. 대화도 하고 저들의 고민을 들어도 줘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말 그대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대남 비난은 더욱 심해졌고 우리 지도자에 대한 욕설은 갈수록 농도가 짙다. 게다가 우리 쪽에 대해 '이것 해라, 저것 해라'고 요구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저들과 대화를 못 해서 안달인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우리 쪽이 선수(先手)를 쳤으면 한다.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애기봉의 크리스마스트리도 없애고 전단 살포도 말리면서 '좋은 소식'을 학수고대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 아니라 당당히 조건 없이 만나자고 먼저 이니셔티브를 취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대북 협상 역사는 항상 북한의 제의를 기다리며 그쪽의 조건에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만나고 안 만나는 것은 북한이 정했고, 일이 성사되고 안 되고도 북쪽의 성의에 달렸다.

우리가 그런 패턴에 길들여져 왔기에 북한은 늘 자기들의 주도로 남쪽을 이리저리 요리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우리 정치 체제로 인한 문제도 있다. 북한은 수십년간 한 사람이, 한 책임자가, 한 부서가 대남 업무를 맡아온 데 비해 우리의 대북 업무는 정권마다 다르고, 대통령마다 다르고, 장관마다 달라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남쪽에 있는 친북·종북 세력이 대북 입장에 관한 한 정권과 대통령의 '목줄'을 쥔 듯이 행세해왔고 이제는 이들이 버젓이 국회에까지 진출해 있는 상황인 데다 일부 리버럴한 여론이 덮어놓고 감상적인 대북 유화론에 젖어 있는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엊그제 임진각과 통일동산에서 벌어진 사태는 대북 문제에 처한 우리의 처지와 신세(?)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 문제의 핵심은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북한 또는 그쪽 지지 세력에 끌려다니거나 이용당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가 대화나 협력이나 원조 면에서 능동적으로, 선제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럴 생각이나 자신이 없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긴 안목의 준비도 없이, 적절한 대응책도 없이 막연히 '대화'만 하면 되는 양하는 형식주의는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거기서 진정한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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