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남북물류포럼 추원서(한반도개발협력연구소 소장)

책 읽는 북한 젊은이
일본 교도통신의 히라이 히사시(平井久志) 기자는 1992년 9월 14일, 제8차 남북총리회담 취재를 위해 생전 처음 평양을 방문했다. 첫날 밤 숙소인 고려호텔 방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로등 아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는 ‘외국인 기자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감시요원이 서 있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신경에 거슬린 그는 확인 차 호텔 앞거리로 나서 이들 사이를 지나가며 깜짝 놀랐다. 젊은이들은 외국인 기자를 감시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가로등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쇄 상태가 썩 좋지 않은 황색 교과서를 손에 들고 둔탁한 빛을 내는 가로등 아래에서 책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1992년에는 북한경제가 심각한 상황에 빠져들어 밤이 되면 평양 시내는 주체탑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빛이 없었다. 이들은 전기 공급이 끊어져 집에서는 책을 볼 수 없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여 공부를 했던 것이다. 히라이 기자는 최초의 평양 방문 때의 이 광경을 북한에 대한 ‘절망’과 ‘희망’의 공존으로 묘사하며 당시의 충격을 기록하고 있다.

통일대박론의 근거 - 북한 주민의 교육열
연초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많은 기대와 비판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필자 역시 통일과정의 중요성에 대한 성찰과 진지한 노력 없이 난무하는 장밋빛 환상을 경계하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굳이 통일대박론의 근거를 하나만 대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이와 같은 북한 주민들의 교육열을 꼽고 싶다. 비록 체제가 달라 공부하는 과목이나 주안점은 다를지라도 북한은 어느 국가보다도 우수한 두뇌와 향학열을 지닌 2천 5백만 명의 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작고한 미국 하버드대의 사뮤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남한의 발전을 1960년대의 가나와 비교하면서 한국인이 갖고 있는 근면성, 미래에 대한 투자, 교육열 등 사회적 자본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추동한 원천이라고 분석한 것과 맥이 통한다 할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당시 부모 세대들은 자신들은 굶주리면서도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했으며 현재의 50~60대들은 이러한 부모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학업과 생업에 정진한 것이 오늘날 경제발전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학문을 숭상하고 자녀 교육을 중시하는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만일 올바른 방향을 잡고 노력만 한다면 ‘대동강의 기적’을 가져올 충분한 잠재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향학열, 평화와 협력으로 유도해야
문제는 이와 같은 자질과 향학열을 지니고 있는 북한 청년들을 어떻게 하면 평화와 협력의 광장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미래 통일한반도의 인재와 역군으로 육성해 나가느냐는 것이다. 북한 역시 2000년대 이후 경제발전을 위해 선진국들의 학문과 기술 습득에 남다른 관심과 노력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봄 한 국제세미나에서 만난 피터 벡(Peter Beck) 아시아재단 한국지부 대표는 동 재단은 매년 약 1만 2천권의 미국 대학교재를 북한에 보내 지금까지 약 20만권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기왕에 책을 주려면 3분의 2는 가급적 수학과 과학 관련 교재를 달라고 해서 요구를 수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책들은 평양과 지방의 인민학습당에 배포되어 북한 젊은이들의 학습에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아시아재단 외에 독일의 여러 민간 재단 등이 북한과의 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힘쓰고 있다고도 했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중국 역시 여러 해 전부터 몇 개 대학과 사회과학원 등에서 조용히 북한 학자들이나 관료들을 초청하여 시장경제와 금융 등을 학습할 수 있도록 지원해오고 있다. 또한 얼마 전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한 바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대북 교류단체인 ‘조선 익스체인지'는 독일의 민간단체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 지난 6월 4일과 5일 이틀 동안 라선시에서 부처 관계자 24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제연수회를 가졌다.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에서 경제특구를 관리하는데 어떤 문제점들이 나타났고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 외교부는 2000년부터 영국문화원과 공동으로 북한에서 진행해오고 있는 영어교육과 교원 강습프로그램을 2017년까지 3년간 연장키로 함으로써 대학 7곳, 중학교 3곳이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한편, 대내외에 많이 알려진 평양과기대는 2010년 10월 개교 이래 북한 내 유능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영어로 강의가 이루어지는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연변과기대를 설립 운영한 바 있는 김진경 총장이 중심이 되어 한국의 기독교계와 뜻있는 이들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지난 5월 21일 첫 졸업식을 가졌다. 그러나 남북관계 악화로 한국 측 인사들의 방문이 불가한 상황에서 외국국적의 교수들만이 강의를 실시하고 있다. 어려운 재정 속에서도 2012년 이후 영국의 웨스트민스터大, 캠브리지大를 포함하여 스웨덴, 중국 등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있다.

정부, 민족의 미래역량 증진 사업 추진해야
이렇게 해외의 뜻있는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북한 교육지원 활동을 접하면서 어쩐지 아쉽고 공허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노력을 크게 뒷받침해야 할 남한 정부가 뒷짐을 지고 있으며 민간 NGO 역시 5․24 조치로 인해 완전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남북관계를 제로섬 게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거시적이고 생산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남북협력이 가장 필요한 분야의 하나가 학술과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문화교류일 것이다. 우선 함께 우리말을 갈고 닦고, 역사를 연구하고, 문학과 예술 등 창작활동의 성과를 나눌 수 있으며, 기초과학 등의 분야에서도 서로의 발전을 자극하는 긍정적 활동이 가능할 것이다. 북한이 원한다면 국제사회와 교류 시 필요한 실제적인 교육과 함께 발전경험의 공유도 가능할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키며 가정과 나라를 살찌우게 하는 장기적 투자이다. 민족동질성 회복을 실천하는 차원에서라도‘공부하는 북한’을 지원하고 함께 민족의 미래 역량을 키워나가는 사업을 적극 전개해줄 것을 광복 69주년을 맞이하는 소회로 정부당국에 촉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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